Page 163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163

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행촌의 저서는 3종이 있다.



                    행촌 이암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를 지어 시원 국가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

                    훈』을 지어 환단시대 이래 전수되어온 도학과 심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 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26)



                   「연보」에 따르면 행촌은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무르며 『태백진훈』을 저술했다(1335년).

                 그런데, 행촌이 소전거사로부터 신서와 진결을 받고 『태백진훈』을 저술한 곳은 양주 천보산보다
                 는 춘천 청평산이고 태소암은 문수원의 여덟 암자중에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행촌삼서중에 하나인 『태백진훈』은 행촌의 4대손 이맥이 『태백일사』에 수록하였다. 이후 『태백
                 일사』를 소장하고 있던 해학 이기는 주석을 달고 「증주진교태백경(增註眞敎太白經)」을 냈다. 최근

                 에 해학의 손자 이일현이 소장하고 있던 『귀독오서집(歸讀吾書集)』에 『해학유고(海鶴遺稿)』가 수
                 록되었고, 그 안에 「증주진교태백경」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세상에 공개되었다.                            27)  「증주진교태백

                 경」에는 저자를 태소씨(太素氏), 주석자를 효산자(曉山子)로 기재했는데, 태소씨는 『태백진훈』의
                 저자인 행촌 이암을 뜻하고 효산자는 주석을 단 해학 이기로 보인다. 따라서, 「태백일사」 고려국본

                 기와 「연보」에서 전했듯이 천보산 ‘태소암’에서 행촌 이암이 『태백진훈』을 저술했다는 기록은 사
                 실로 확인되었다.



                 Ⅲ. 강화도 해운당




                     1. 고려의 단군 인식



                   1135년 서경천도와 칭제건원을 주장했던 묘청 세력이 진압되고 10년 후인 1145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그 이후에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했던 무신정권이 1270년 항복
                 하고 개경으로 환도한지 15년이 지난 1285년에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2년 후인 1287

                 년에는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편찬했다. 이처럼 외침과 내란이 있은 뒤에는 혼란한 정국을 안정
                 시키고 국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국가나 사가에서 사서(史書)의 편찬이 있었다. 이런 시점에

                 쓰여진 『삼국유사』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제왕운기』는 『국사(國史)』와 『본기(本紀)』
                 를 인용해서 단군을 동방의 시조이자 국조로 썼다는 점이 주목된다.







                 26)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732~735쪽. (「태백일사」고려국본기)
                 27) 박종혁, 『해학이기의 사상과 문학』(대전: 상생출판, 2020), 55쪽.



                                                                                                    163
   158   159   160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