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0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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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2
의 심법서인 『태백진훈』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한 다음 해에 행촌은 지신사(知申事)에 제수되고 동지추밀원사로 진급하
였다. 충목왕을 거쳐 공민왕 초에 철원군(鐵原君)으로 봉해졌으나 사직할 것을 간청하여 1353년
행촌의 나이 53세에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가 5년간 은거하다가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청평산으로 은거한 기록은 『고려사』 열전과 「[철성부원군(鐵城
府院君) 이문정공(李文貞公) 묘지명」(이하 「묘지명」으로 약칭)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근거가 분명
하다.
계사년(공민왕 2, 1353)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나이 장차 60이 되고 지위 또한 극에 달하
였으니, 이때에 은퇴하여 물러가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랴’하고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
(淸平山)으로 들어갔다. 10)
공민왕(恭愍王) 초에 철원군(鐵原君)으로 봉하자 사직할 것을 간청[乞骸]하고 청평산(淸平山)
으로 들어갔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11)
2. 천보산과 청평산
천보산은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암과 이명, 범장 셋이 만나 소전거사로부터 神書를 받았다는 「고려국본기」의 기록에는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첫번째, 범장과 원천석은 『화해사전』과 『화동인물총기』를 함께 집필했는데 이 책
에서 원천석은 범장을 ‘범군(范君)’으로 부르고 있다. 범장이 원천석의 나이와 같거나 어리다는 뜻
이다. 12) 만약, 같은 나이라면 천보산 결의 때(1335년) 범장은 겨우 6살의 소년이었고, 『여말충의
열전』에 나오는 것처럼 범장이 1342년에 태어났다면 13) 천보산 결의는 범장의 출생 7년 전의 일이
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의 춘천에 소재한 청평산에 은거했던 이명이 경기도 양주의 천보산까지
가서 행촌 이암을 만나는 것도 무리가 있다. 따라서, 박성수의 견해처럼 태소암은 청평사의 전
신 14) 이고, 천보산은 행촌이 처음 은거했던 경기도 양주의 천보산이 아니라 두 번째 은거지였던
춘천 천평산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행촌이 청평산에 은거했던 1353년부터 1358년까지 5년간
범장의 나이는 24세~29세가 되며, 만약, 범장이 1342년에 태어났다면 12세~17세가 되어서 정
황상 맞지 않으므로 범장의 나이는 원천석과 같거나 약간 어린 것으로 판단된다.
10) 『牧隱文藁』 권17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문정공(李文貞公) 묘지명’
11) “恭愍初, 封鐵原君, 乞骸入淸平山, 王徵還守門下侍中” (『고려사』 「列傳」 卷第二十四)
12) 노종상, 「복애伏崖 범장范樟 연구」, 『세계환단학회지』3(2), (2016), 34쪽.
13) 고려숭의회, 『여말충의열전』(고려숭의회 출판부, 1994), 249쪽.
14) 박성수, 「맥국의 유래와 춘천-우두대촌과 청평사」, 춘천문화원 창립 60주년 학술회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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