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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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으로 가르침을 베풀고 옛 것을 좇으니 그것이 풍속이 되어 인심이 가라앉은지 오래되었다.
3)
고려 선도(仙道)의 도량이었던 청평산 에 은거하던 이명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해서 『진역
4)
유기』 3권을 썼는데, 『조대기』는 세조 3년(1457년) 팔도관찰사에 유시(諭示)한 수서 목록에 보이
고, 이맥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9번 인용된 것을 보면 조선 초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천보산 결의 3년 전인 1332년, 고려 조정은 원(元)의
간섭으로 충혜왕이 재위 2년 만에 물러나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때 충혜왕의 총
애를 받았던 정승 윤석(尹碩) 등 28명이 ‘전왕(前王)의 패행(嬖幸) ’이라는 명목으로 대거 퇴출되
5)
었는데 행촌도 이들과 함께 갇혔다가 강화도(교동)로 유배되었다. 행촌의 아버지 이우도 파직되어
고향인 고성으로 보내졌다. 원의 간섭으로 일어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관직을 떠난
행촌의 좌절감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6)
충숙왕이 복위하자 이암을 충혜왕의 폐행(嬖幸)이라고 하여 장(杖)을 때리고 해도(海島)로 유배
하였으며, 이우(李瑀)를 파직하여 전리(田里)로 귀향시켰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知申
事)를 제수하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진급하였으며, 정당문학 첨의평리(政堂文學
僉議評理)로 전임(轉任)되었다. 7)
원의 간섭과 조종에 의해 왕이 바뀌고 다시 복위되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심경은 행
촌이 말년에 쓴 『단군세기』 序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금일(今)에 외인(몽골인)이 정사를 간섭함이 갈수록 심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고 다시 오름을 저
희들 멋대로 조종하되, 우리 대신들이 한갓 속수무책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라에 역사가 없
고, 형체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로다. 8)
1332년 유배를 떠나서 충혜왕이 복위하는 1339년까지 7년의 기간 동안 행촌의 행적은 정사(正
史)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행촌선생연보」 (이하 「연보」로 약칭)에 따르면 3년간의 강화도 유배
9)
가 풀리자 행촌은 천하유력에 나서고, 1335년 천보산 태소암에 들어가서 1년 동안 머물면서 道學
3) 북애, 고동영 역, 규원사화 (뿌리, 1986), 8쪽.
4) 한영우, 「행촌 이암과 < 단군세기 >」, 『한국학보』25(3), (1999), 119쪽.
5) 임금에게 아첨하여 사랑과 총애를 받는 신하나 후궁
6) 한영우, 앞의 논문, (1999), 118~152쪽.
7) “忠肅復位, 以嵒爲忠惠嬖幸, 杖流海島, 罷瑀歸田里. 忠惠復位, 授知申事, 進同知樞密院事, 轉政堂文學僉議評理.” (『고
려사』 「列傳」)
8)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69쪽.
9) 후손 李三文이 편찬하여 가지고 있던 것을 이덕수, 이용담 등이 1920년에 증보하여 간행한 것으로 독립투사인 홍범
도의 발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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