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3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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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那興亡史』를 통해 본 末松保和의 한일 고대사 인식 채정웅
중국 통교는 372년 東晉에 조공 사신을 보낸 후 100년간 남조의 宋과 통교하였으나 472년 고구려
견제의 직접 효과를 노리기 위해 처음으로 북조의 魏에 入朝하여 장문의 表文을 바치며 원병을 요
청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이는 宋이 멸망한 후 濟와 梁으로 잇달아 정권이 바뀌어도 변화는 없었다.
단지 변함없이 지속된 것은 대대의 왕이 중국으로부터 중국의 爵號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어지
는 기사에는 임나가 백제가 대립한 사실, 백제가 南濟로부터 작호와 封地를 하사받은 사실을 열거
하며 그곳이 원래는 임나의 땅이었음을 밝힌다.
백제가 고구려 세력에 의해 남진한 사실은 수십년간 임나의 직접적인 문제였으며, 508년 백제가
제주도를 정복한 사실은 종래 관계의 대변화로 백제의 적극적인 압박에 의한 종속 관계를 의미한다
고 하였다. 이 가운데 임나의 사정도 불투명해졌고, 일본과 백제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불확실의 10년 동안 백제가 4현을 획득하고 己汶, 帶沙를 영유하게 되는데 이에 반발하여 가라와
신라의 연합, 신라의 팽창, 신라의 가라 침략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하였다.
가라 제국은 일본에서 떨어져 신라를 의지하게 되는데 그 단적인 예가 가라 국왕의 신라와의 통
혼이었다. 이후 금관가야의 신라 투항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임나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주장이다.
5. 임나의 멸망
금관가야의 멸망, 특히 국왕의 신라 투항에 의해 일본이 받은 충격은 임나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직접 일본 자체의 안위의 문제로 중요시할 수 밖에 없었다. 536년 5월 일본 조정에서는 둔창의 곡
식을 모아 미야케(博多)를 만들어 비상 상황에 대비했다. 그 다음 해 (538) 백제는 60여 년간의 수
도였던 웅진을 버리고 부여로 천도하였는데 이 세 번째 천도의 배경은 웅진 천도가 고구려의 공격
의 결과였는데 반해 외적의 침입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회생의 기운을 불어넣어 대규모의 신도
시를 경영할 계획에 의해서였다라고 한다. 백제의 방위는 고구려의 맞상대가 되려는 의지였으며
천도 직후인 541년 백제는 신라와 화목하게 지내기를 청했다. 신라는 이를 받아들였고 백제의 양
면 외교는 더욱 두드러져 갔다. 양면 외교란 일본에 대해서는 신라를 적대 관계로 보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신라와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은 백제에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왠지 동포
인 임나를 위해서는 백제를 움직이게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부흥책 내지는 반도 정책 실행의 맹주
로 백제왕을 선택했다. 백제와 신라의 화약이 성립된 541년 4월 임나의 여러 국왕들은 임나의 재
상으로 선택된 백제에 모여 야마토 조정의 조서를 받았다. 이것이 임나일본부의 기원이다. 백제의
성명왕은 조서를 읽고 신라에 이를 고하였으나 신라의 응답이 없자 백제 임나만으로 결과를 천황
에게 고하였다. 한편 신라의 공세는 임나를 압박하였고 여러 임나국들이 신라에 복속되었다. ‘이
전에는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 병력을 요청해 임나와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어째서 신라 혼자의 힘
으로 임나를 멸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의 힘을 모아 천황의 힘을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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