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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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2
수 있다.’ 이러한 임나일본부의 의견이 欽明천황에게 전해진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
는 백제의 지도권의 강대함과 일본 사신의 무대책에서 기인한 것으로 임나는 파악하였다. 南加羅,
卓淳 등의 패망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임나제국의 연합 형태가 신라의 강대함에 더이상 유지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 백제는 임나 제국과 임나일본부가 신라와 통교하는 것을 경계하
는 동시에 일본 조정의 역할을 획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542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임나의 정정
을 보고하고 신라의 진출에 대처하기 위해 백제에 군령 성주의 설치, 주요 사신의 일본 소환 등을
청구하였는데 당시 백제는 임나 각지에 군령 성주를 두어 임나의 지배와 방비를 꾀했다. 이는 신라
보다 먼저 임나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는 백제의 임
나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고, 신라와의 나제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막아 내었
지만 강대해진 신라의 힘에 밀려 한강 유역을 내주게 되었고, 고구려마저 신라에게 밀리게 되었으
므로 임나에 대한 신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였다고 한다. 임나가 신라에 멸망한
이후 신라는 임나를 복속한 대가로 일본에 임나의 조(調)를 바쳤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임나의 원
래 소유가 일본이었다는 논리인데 임나흥망사의 전체에서 일본서기의 기사를 토대로 일본은 늘상
백제와 신라의 上國임을 주장하는 末松의 논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6. 임나 문제의 결말
임나의 멸망 즉 신라의 임나 합병은 562년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 임나 문제는 단순
히 임나의 영역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646년까지 즉 80년 이상 계속되었다. 書記의
孝德천황 大化 2년 기에 ‘9월 小德高向 博士 黑麻呂를 신라에 파견하여 質을 바치게 하였고 이후 임
나의 조(調)를 파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일본서기에 나타난 임나 문제에 관한 최후의 기
사이다. 이 교섭이 중대시되는 이유는 사자로 간 高向黑麻呂의 당시에 있어서 높은 신분을 감안하
면 타당하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黑麻呂는 608년 최초의 견수 유학생의 일인으로 3년간의 유
학 후 640년에 귀국, 5년 후 國博士가 되어 大化改新을 조율하는 학문적 기술적 최고 고문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소위 임나의 조(調)의 실체는 임나가 망한 후에도 임나 문제가 지속됨을 보여준다며 임나
멸망(562) 이후에 명확한 임나의 조(調)를 바친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600년은 임나가 신라에 망한 후에 처음으로 신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한 해이다. 이 해의 중
요성은 단순히 신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외 정책 전반에 일대 전개가 시작되었기 때문
이라 한다. 476년 마지막 일본의 중국 통교가 일본서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중국의 사서 隨書에 명
기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기사를 통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견수사 파견은 한반도에의 적극적 파
병과 상관없이 당년의 외교 정책을 형성해 왔음을 보여준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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