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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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2
2) 기사년의 史實
末松가 기사년의 기사를 중요시한 이유는 이 해에 일본에 의해 평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역
의 광범위함 때문이라고 한다. 먼저 신라를 격파하고 평정한 7개국에 관해서 보면 낙동강 중류 이
남의 대부분의 지역이 왜에 의해 점령된 것으로 보고 있다.
1. 比自㶱(ヒジホ) :경상남도 창녕
2. 南加羅(アリヒシノカラ): 경상남도 김해
3. 㖨國(トクノクニ): 경상북도 경산
4. 安羅(アラ): 경상남도 함안
5. 多羅(タラ): 경상남도 합천
6. 卓淳(トクシユ): 대구
7. 加羅(カラ): 경상북도 고령
여기에 더해서 전남 강진을 복속시키고 전남 나주, 전북 김제, 충남 공주 등 지역의 항복을 받아
내고, 백제왕과의 맹약을 통해 고부 등을 영역으로 하는 광대한 지역을 군사 점령했다고 주장한다.
신라의 본지를 격파하고, 낙동강 양안의 7개국, 경남 지역의 태반과 제주도를 토벌했으며, 전라남
북도에서 충청남도의 일부를 백제왕과의 약속을 통해 임나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한다. 한편 백제
의 발전은 임나의 미병합지인 전라도 방면의 여러 국가들을 병합하는 데서 예기된 것으로 그 실현
을 위해서는 먼저 북방의 방비를 충분히 하여야만 했다. 북방에는 낙랑군을 멸망시킨 고구려 세력
이 남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동남 방면에는 신라가 눈을 뜨기 시작해서 낙동강 일원을 병합해
세력을 넓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백제는 우선 동남 방면의 가라 제국에 대한 신라의 야망을 저지시
키기 위해 일본과 제휴 동맹의 형태로 선취권을 잡고 일본에 의한 점령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
적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토의 일부분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을 감수하는 맹
약을 통해 백제는 북방으로 진출해 평양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중국의 東晉과도 교
류할 수 있었다 한다. 백제가 아득히 먼 바다 건너의 일본에 의지한 이유는 1. 가라 제국에 대한
일본 기존 세력의 영향력 2. 신라에 대한 압박 3. 당시 백제 땅에 직접 미친 일본의 영향력 등을
들 수 있다 한다. 이때 백제 땅에 미친 일본 세력이라 함은 1세기 이후 지속된 일본의 낙랑 대방과의
통교가 심어 놓은 세력을 말한다며 임나일본부의 시작을 1세기까지 확장한 것이다. 역사적 근거에
기초하여 왜인들의 적극적 행동 의지야말로 백제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체로서의 백제를 만들고
367년 백제가 처음으로 사신을 일본에 보내 일본 조정과의 직접 교류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주장
한다. 이 적극적인 백제의 일본 통교의 진의는 일본에 대규모 출병을 요구하는 것으로 己巳年(369)
의 출정은 백제의 요청에 의한 것인데 이것을 계기로 對韓 經略의 일보를 내딛게 된 것이므로 이
출정의 성과로 보아 백제는 국책으로서 일본에 대한 종속 관계를 스스로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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