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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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2


                 들에 의해 문화적 유산 또한 다수 전승되어 근접해 있던 한반도 거주 여러 종족들에게 영향을 미쳐

                 제 종족들의 통일 운동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韓족은 극히 느슨한 통합체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분립은 낙랑 대방의 멸망를 계기로 통합통

                 일 운동을 일으켜 4세기 중반에 백제, 진한의 사로국에 의한 통일이 결실을 맺게 되고, 이 둘을 중
                 심으로 한 통일 이외에 제3의 통일 세력이 있는데, 그것은 임나 가라 자체가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

                 온 세력이라는 것이 자생적 통일체인 백제, 신라와의 차이점이라 하였다.
                   일본의 낙랑 통교는 낙랑의 선진 문물 수입이라는 주류적인 교류와 그 부차적 교류로서 韓地를

                 채취하는 것, 즉 한반도의 자연물 위주의 수입이라는 두 가지 교류가 있었는데, 낙랑 대방의 멸망
                 과 그에 따른 한족 세력의 가지에서의 통일 움직임으로 인해 그대로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일본은 임나가라를 본거지로 하는 새로운 韓地 통일운동을 추진하
                 는데 백제, 신라의 통일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현 상태로 제지하고 두 나라의 통일 범위 밖에

                 해당하는 지역을 임나가라의 확장을 통해 영유하고 미성숙의 백제, 신라를 임나의 산하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370년 경의 ‘임나의 성립’의 배경이었음을 주장한다.

                   임나 성립 당시는 정치권익체의 형태로 직접적으로는 마한의 중부 이남, 진한의 일부와 변한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간접적으로는 백제 신라를 지배하는 형태를 유지하였는데 백제, 신라의 고대

                 국가로의 발전에 따라 임나는 점점 쇠퇴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며, 결국 임나의 쇠퇴 멸망은 백제
                 신라의 성장의 반면(反面)이라 하였다. 임나의 멸망이 일본의 통치 방침의 착오이든가 아니면 현지

                 임나의 사신의 시책의 잘못이든 간에 임나의 성립이 일본의 강렬한 의지가 드러난 군사적 행위로
                 서 그 당시에는 열등한 세력인 백제, 신라, 고구려의 종족적 통일 의욕을 자연스럽게 꺽은 것으로

                 이것은 넓게 보면 부자연스러운 사실이었고, 이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임나 흥망
                 의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370년대에서 시작된 임나기의 마지막을 640년대로 상정한 것은 이 시

                 기를 끝으로 ‘임나의 조(調)’가 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임나의 조(調), 임나의 정(政)에 관해서도 末松는 10장 1절을 통틀어 자세

                 하게 기술하고 있다.
                   임나의 정(政)은 미야케(ミヤケ)의 형식을 대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미야케는 원래 조정(朝廷)을

                 의미하는 오호야케(オホヤケ) 등 궁소(宮所)인데 屯倉, 屯家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에는 본뜻인
                 미야케의 분신, 분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즉 조정 직속의 미타(御田), 그 경작자인 田部,

                 거기서 나오는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와 관리자의 주택을 총괄하는 이름으로 屯倉, 屯家 등의 한자
                 는 미야케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 일본서기의 대한 관계 기사 속에는 ‘官家’로 기록되어 있어 일본

                 국내의 屯倉, 屯家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나, 실제로는 미야케로 호칭한다는 내용이 백제인
                 의 상표문(上表文)에 ‘彌移居’라는 한자음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미야케가 일본 국내에서는 이미 야마토 조정의 기본적 기구의 하나이며 그것을 한반도에 적용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주장한다. 神功왕후가 신라 정벌 후 이름을 御馬甘(미야카히)로 정한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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