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7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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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那興亡史』를 통해 본 末松保和의 한일 고대사 인식 채정웅
백제를 渡屯家(와타노미야케)로 정했다는 古事記의 기사를 인용해 임나 성립 후 백제 신라를 포함
하는 한반도 각지의 여러 국가들을 각각 미야케로 삼아 전체적으로 ‘미야케 나라들’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이 임나는 지리적으로는 백제, 신라를
포함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는 백제, 신라가 임나의 광대한 정치 기구 중의 일부분(중추부)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은 임나도 백제도 신라도 전부 이 미야케 나라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야케 나라들 중 임나는 야마토 조정의 직접 지배를, 백제 신라는 간접 지배
를 받았는데 임나는 성립 이전의 정치 형식, 공물(貢物)제를 그대로 유지해서 종래 각국의 수장 위
에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지배자를 두었고, 백제 신라는 기성의 통일을 인정해 백제왕, 신라
왕에 의한 미츠기(調)의 공상(貢上)을 의무화하게 했다는 것이다. 백제, 신라의 조(調)는 대한(對韓)
경영의 주목적의 하나로 임나의 정(政)의 일부를 형성하는 중요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사
가들이 이를 경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츠기(調)는 조공이 순조로울 때는 기록이 희박하므로
미츠기의 기록 여부를 통해 임나 흥망 200여년 동안의 정치의 흥망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 하였다.
임나의 정(政)의 구체적 사실로서 두 번째 문제는 임나의 지배자에 관한 것인데, 간접 지배 형태
의 백제 신라에는 야마토 조정이 상주하는 지배자를 보낸 흔적은 발견되지 않으나 직접 지배하는
임나에는 지배자를 보내 임나 전체의 지배자가 되게 하였다 한다. 임나의 지배자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제적 지배자가 되는데 이러한 임나의 상비군 수장이 木滿致이었다라는 것이다. 한편 임나
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쟁송의 기록을 통해 왜인과 임나인 사이에는 국적 및 사회생활상의 권리
의무 등에 차별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한반도의 여러 국가들의 정치에 대한 의욕은 일본에 비해 약했
으나 정치 기구는 낙랑 대방 시대 漢민족의 군현제도의 영향으로 일본보다 진보한 것으로 보며,
그런 의미에서 國司제도나 호적제도 등을 통해 볼 때 7세기의 수당 유학생이 학문적으로 중국으로
부터 얻고자 했던 것들은 이미 임나의 정(政)을 거치며 실제로 경험한 것이라 본다. 한편 낙랑 통교
를 통해 일본의 漢문화 수입은 개개 물품의 수입뿐 아니라 제조 기술과 기술자의 수입도 실현되어
문화의 실용화=일본화라는 현상도 점차 발전해 나갔다고 보고 있다.
V. 결론
일본의 대륙 진출의 희망은 그들이 섬나라를 이루고 살아 온 이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한반도를 지배 경영하고픈 야욕을 놓지 않고 있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중국 대륙으로 진출
하고자 하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멀리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기본적인 대륙 진출
구상은 변함이 없다. 중세 국학자들을 비롯해 근대 이후의 정한론자들과 식민 지배 시절의 군국주
의자들을 관통하며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의 논리를 제공하는 중심에 ‘일본서기’가 있다. 일본서
기는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고 전설과 사실을 뒤섞어 가며 후대에 끊임없이 윤색되어왔다. 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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