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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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에서는 강수의 본관인 석씨를 중심으로 가야는 임나라는 현 한일학계의 주장의 한계를 논하고 임

                 나가랑의 위치를 재비정할 것이다.
                   위의 논지를 바탕으로 여기서 명확히 짚고 넘어갈 역사적 사실은 기존의 선행연구자들이 대부

                 분 주장한 강수가 중원인 국원에 살고 있는 계기로 논했던 “강수는 대가야나 금관가야의 귀족의
                 후손으로 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이주하였다는 주장”은 강수에 대한 기초문헌 사료 검토도 없이

                 주장되어 온 허구란 것이며 그 논리에 입각한 ‘가야는 임나’라는 주장도 논리 근거를 잃게 되었다
                 는 것이다. 강수는 대가야나 금관가야의 인물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석탈해의 후손이기에 대가

                 야와 금관가야와 연결 지어 사민斯民된 존재로의 강수존재는 원래부터 역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강수의 본(本)의 의미로 본다면 강수열전의 임나가랑은 석씨 성의 기원처를 의미하는 것이

                 명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4) 강수열전 임나가랑과 진경대사탑비의 임나와의 번역 연계성



                   강수열전의 강수의 본(本)과 임나가랑 기록에 대한 오역(誤譯)발생 근본이유가 사료원문에 대한
                 이해부족인 것으로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예는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의 오역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

                    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



                   그동안 진경대사탑비에 기록된 내용은 조선총독부 시기로부터 한반도내 임나존재의 증거로 인
                 용되며 진경대사는 신김씨 新金氏로서 선조는 임나왕족(任那王族)이며 김유신을 먼 조상(遠祖)으

                 로 해석하였다. 김유신이 금관가야왕족이기에 곧 “임나는 금관가야(일본서기 남가라)”라고 규정
                 짓다시피 번역하여 임나의 위치비정과 가야와의 관계를 주장하는 자료로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 밝혀진 바대로 신김씨인 진경대사와 김유신과는 아무런 관계설정이 되지
                 않는다.   35)  이현태는 삼국사기 기록을 분석한 결과 김유신은 신김씨를 사용한 적이 없기에 김유신

                 가문과 신김씨와 연결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36)  그는 일본제국주의 학자들과 한국사학계가
                 한반도 임나존재 증거의 사례 중 하나로 인용하여 온 진경대사와 김유신 가문과의 관계설정을 명

                 백히 끊었다. 하지만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가야와 임나를 연결 짓는 논거가 진경대사탑비임을 의식

                 34) 이병선, 「임나국과 대마도」, (아세아문화사, 1987). 43∼44쪽
                 35) 이현태,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한국고대사학회, 2006)
                 36) “삼국사기 기록의 김유신 가문은 신라 중.하대에 걸쳐 김씨만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어 신김씨는 김유신 가문
                 과 연결시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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