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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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강수열전 정역을 통한 임나가랑의 위치비정  이완영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

                    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冝弃
                    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并寳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徃.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

                    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繋海岸, 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 身長九尺, 風神秀朗, 智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

                    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冝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冝名脫解.” 』                       41)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一 脫解 尼師今>>



                   탈해왕의 출생지, 석씨의 본이 다파나국이며 그 나라는 왜국으로부터 동북 1천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이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 삼

                 국유사에도 등장한다.



                    『供給七日迺言曰 “我夲龍城國人 亦云正明國或云琓夏國琓夏或作花厦 國龍城在倭東北一千
                    里』 42)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 第一 第四 脫解王>>



                   삼국유사에서는 다파나국이 용성국 혹은 완하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왜(倭) 동북 일천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의 거리는 고대 측량기술의 한계로 보아 직선적인 거리가 아닌 이동수

                 단인 배와 보행으로 측정된 거리로 봐야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기록의 ‘왜의 동북 1천리 ’위치상의 나라는 없기에 오기 誤記로 보기도 하였

                 다. 용성국을 불교의 영향력을 받은 서역의 나라일 가능성, 신라인으로 왜지에 살다온 탈해로 보는
                 견해  43) 와 낙랑관련 지역, 대륙 북방이나 해양계 남방지역, 경주 동해안, 울산지역의 야장집단 冶




                 41)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왕의 성은 석씨
                 (昔氏)로,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바
                 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년(B.C. 19)의 일이었다.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작(鵲)’의 글자를 줄여서 ‘석(昔)’으로 씨(氏)를 삼고,註 013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번역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참고
                 42)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사내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 사람이다. 한편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번역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참고)
                 43) 蘇在英, 「三國遺事의 外來者 論攷-瓠公·脫解說話의 경우」, (金亨奎博士頌壽紀念論叢,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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