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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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조선사 대계(上世史)” 기록을 본다면 일본서기 임나를 조선의 가야로 설정하기 위한 증거로 광
9)
개토호태왕비문의 임나가라와 진경대사탑비의 임나왕족, 삼국사기 강수열전의 신본, 임나가랑인
(臣夲任那加良人) 기록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249)조의 내
용을 가야지명과 연계하여 창녕을 비자발(比自㶱), 김해를 남가라(南加羅), 대구를 록국(㖨國), 함
안을 안라(安羅), 거창과 합천을 다라(多羅), 창원을 탁순(卓淳), 고령을 가라(加羅)로 지명비정을
하고 있다. 10) 대일항쟁시기 일인(日人) 학자들의 강수열전 인용은 한반도내 임나존재의 전제증거
와 임나지명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한국사학계 학자들의 강수에 대한 인물 연구는 유학자와 패망한 ‘가야의 귀족’으로서
인물됨을 논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기백은 그의 연구 강수와 그의 사상 11) 에서 강수의
배우자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강수를 신라 사회의 불문율이었던 일부다처제의 틀을 파괴
하며 일부일처제를 내세운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신라유학자의 한 인물로 강수를 주목하며
임나가야의 귀족계급에서 신라 6두품에 편제된 인물로 보았다. 12) 김창겸도 같은 논지로 강수를
사민(徙民)된 임나가야 귀족 출신의 후예로 보았다. 13) 서영교는 신라 골품제도 안에서 강수와 그
의 아내에 대한 신분제를 주목하였다. 14) 김창겸은 신라사회 골품제와 신라 중기 왕권강화를 위한
호국적 불교사회에서, 통일 후 유교적 합리주의가 중시된 시대상황으로 변화됨을 주목하며 강수
사후 아내의 삶을 조명하였다. 15) 서울대 중국어문학총서 16) 에서는 강수를 문선(文選)에 능통했던
유명한 문장가로 언급하였다.
Ⅲ. 강수의 태생과 성(姓)에 대한 기존의 논지와 새로운 방향성
1. 강수 태생에 대한 제연구
강수열전의 원문의 임나가랑이 가야로 비정된 논리는 여러 가지 논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강
수가 태종대왕에게 자신의 성명을 고하면서 자신의 성(姓)인 본(本)으로 임나가랑인으로, 이름(名)
을 우두(牛頭)라고 아뢰었다.
9)오다 쇼고(小田 省吾), 「朝鮮史大系 上世史」, (경성 조선사학회, 1928)
10) ______________, 「朝鮮史大系 上世史」, (경성 조선사학회, 1928). 137∼150쪽
11) 이기백, 「강수와 그의 사상」, (문화비평 3, 1969)
12) 이기백, 「신라사상사 연구」, (진단학회, 1969). 212 ∼213쪽
13) 김창겸, 「강수와 신라사회」, (진단학회, 2006). 33∼66쪽
14) 서영교, 「强首와 治家之女」, (진단학회, 2021). 22쪽
15) 김창겸, 「강수와 신라사회」, (진단학회, 2006). 33∼66쪽
16) 김영문외, 「문선역주」, (소명출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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