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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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匠集團 정도로 보거나 목지국·고조선 등에서 온 이주민집단 등으로 보는 견해 44) 와 노국을 기점으
로 동북 1천리의 혼슈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5)
다파나국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先是 陜父奔南韓 居馬韓山中 從而出居者 數百餘家 未幾 歲連大歉 流離遍路 陜父 乃知將革
誘衆裹糧 舟從浿水而下 由海浦而潛航 直到狗邪韓國 乃加羅海 北岸也 居數月 轉徙于阿蘇山
而居之 是爲 多婆羅國 之始祖也 後倂于任那 聯政以治 三國在海 七國在陸... 多婆羅 一稱多羅
韓國 自忽本而來 與高句麗 早已定親故 常爲烈帝所制 多羅國與安羅國 同隣而同姓 舊有熊襲
城 今九州熊本城 是也』 46)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가 유리왕에게 간언하다가 파직되어 남
한(南韓)으로 떠난 인물인 협보(陜父)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7) 협보의 다파라국은 다라한국(多羅
韓國), 다라국(多羅國)이라고 불렸는데 인접국인 안라국(安羅國)과 성씨도 같고 고구려 계통국가로
기록하고 있다. 협보는 가라해의 북쪽해안에 위치한 구야한국, 현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였고,
아소산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파라국을 건국하였으며, 후에 임나와 연합정권을 수립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또한 다파라국이 임나가랑으로 불리게 되는 배경이 제시되어 있으며, 구주의 웅본(쿠
마모토)성이 다파나국인 다라국의 구마소성이 있었던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日本 舊有伊國 亦曰伊勢 與倭同隣 伊都國 在筑紫 亦卽日向國也 自是以東 屬於倭 其 南東 屬
於安羅 安羅 本忽本人也 北有阿蘇山 安羅 後入任那 與高句麗 早已定親 末盧國之南曰大隅國
有始羅郡 本南沃沮人所聚南蠻忱彌晥夏比自㶱之屬 皆貢 焉 南蠻 九黎遺種 自山越來者也 比
44) 김선숙, 「新羅 脫解王의 出生地와 移住背景」,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82). 90쪽 재인용
45) 김선숙, 「上古時期 韓半島와 日本列島間 주민이동 및 교류양상에 관한 검토」, (한국학연구34,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10). 12∼13쪽
46)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이보다 먼저 협보가 남한으로 달아나서 마한산 속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
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 다니고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 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 시조이다. 후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워 다스렸다. 이때 세 나라는 바다에 있고 일곱 나라는 육지에 있었다... 다파라를 일명 다라한국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에서 이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늘 고구려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웅습성(구마소성)이 있었는데 지금의 구주의 웅본
성(쿠마모토성)이 그곳이다.
47) 『三國史記 髙句麗本紀 第一琉璃王』十二月, 王田于質山隂, 五日不返, 大輔陜父諌校勘 001曰, “王新移都邑, 民不安
堵, 冝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攺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
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 去之南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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