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9
삼국사기 강수열전 정역을 통한 임나가랑의 위치비정 이완영
『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夲任那加良人, 名牛頭.” 王曰, 見卿頭骨,
可稱強首先生』 17) <<三國史記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强首>>
이 문구의 본임나가랑인(夲任那加良人)이 직설적으로 받아들여져 대동지지 18) 에서 ‘충주를 임
나’로 언급하였으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통전의 기록 19) 을 들어 충주가 임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가야를 임나로 동일시하는 조선총독부로서는 충주가 곧 임나가라라고 비
정하기에는 무리한 논리이다. 그렇기에 강수와 임나가랑(任那加良)에 대한 논리는 밝히지 않고 강
수가 태어난 곳이 임나가라였기에 한반도에 임나가 존재했었고 그것이 가야라는 논리의 틀을 만
들어 교육하는 단계로 진행하였다.
광복 이후 ‘가야는 임나’라는 논지는 가야사 연구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강수의 출신지 중원인
충주를 임나가라라고 논리를 정하는 것은 기존의 가야영역의 지리적 강역을 넘어서 그 논리가 상
충되기 때문에 대가야나 금관가야에서 ‘사민(徙民)정책’으로 이주한 임나가라인 후손으로 강수를
조명하며 대가야나 금관가야가 임나라는 논지가 계속 학계에 주장되었다. 이는 충주가 광개토태
왕비문과 진경대상의 임나왕족과 연관된 임나가라로 비정되면 광개토태왕비문의 임나가라 종발
성(任那加羅 從拔城)과 진경대사선조들이 살았던 임나 위치가 다시 재해석되어야 하며 그동안의
모든 관련연구가 자가당착에 빠지고 오리무중이 되기 때문이다.
강수의 태생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임나가랑의 위치’는 언급하지 않고 이주한 인물로의 강수와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후손으로 보는 강수’로 의견이 제시되었다. 서영교는 강수를 중앙관직임명
에 따라 중원경에서 왕경으로 이주한 인물로 보았고 20) 하일식은 삼국사기 본기의 558년 기록 21)
을 통해 강수는 국원에 천사(遷徙)된 가야인으로 중원경 사량인으로 인식하였다 22) . 김복순은 불교
와 강수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대가야의 인물로 강수를 설정 23) 하였으며 임병태도 그의 연구에서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 지배층의 일부가 이미 신라로 이주하며 그 중 일부가 국원으로 이주한 것으
로 보았다. 24) 정구복은 강수의 선조가 금관가야 출신으로 국원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았고 25)
17) (태종무열) 왕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
가량(任那加良)인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선생(强
首先生)’이라 불러야겠다.”
18) 『大東地志』 忠淸道 忠州 沿革 任羅國 羅一作那眞平王滅之 今忠州
19) 『通典』 卷185 邊防1 東夷上. 新羅國 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文帝拜
為樂浪郡公 新羅王其王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
盛因襲 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
20) 서영교, 「强首와 治家之女」, (진단학보 제 136호, 2021). 22쪽
21)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22) 하일식,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新羅文化, 2011). 38쪽
23) 김복순, 「가야사연구-대가야의 정치와 문화-」, (경상북도, 1995), 296쪽
24) 林炳泰,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합집, (역사학회, 1967). 88∼89쪽
25) 鄭求福 外, 譯註 「三國史記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214쪽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