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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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1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
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
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도읍할 만한 곳
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한
다.(『북부여기 상』) 26)
북부여 5세 단군 고두막한
을미 22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
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
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북부여기 하』) 27)
동부여 시조 해부루
을미 (B.C.86) 원년 왕은 북부여의 제재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 살았는데, 차릉(岔陵)이라고도
부른다.(『가섭원부여기』) 28)
위의 사료들은 북부여에 통치권자가 바뀌는 정치적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북부여를
다스리고 있던 왕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이 집권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왕을 밀어낼 정도로 힘을
가진 자가 등장했으나, 신구 세력 간의 권력 이동은 무력적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29) 즉 해모수는 북부여를 세운 사람이고, 해부루는 그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
로 해모수라 칭하는(自稱 解慕漱)’ 자에게 밀려났다는 것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30) 에 버금갈
정도의 인물로 북부여의 중흥을 이룬 왕임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일부에서 ‘자칭 해모수’를 진짜
해모수로 해석하여 스스로 역사 논리의 오류 31) 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32) 북부여 건국자 해모수
26) 『北扶餘紀上』 : 甲午三十四年十月東明王高豆莫汗使人來告曰我是天帝子裝欲都之王其避之帝難之是月帝憂患成疾而
崩皇弟解夫婁立之東明王以兵䝱之不己君臣頗難之國相阿蘭弗奏曰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腴宜五穀可都遂勸王移
都是謂迦葉原夫餘或云東夫餘
27) 『北扶餘紀下』 : 乙未二十三年北夫餘奉城邑降屢哀欲保帝廳之降封解夫婁爲候遷之岔陵帝前導鼓吹率衆數萬而入都城
仍稱北夫餘
28) 『迦葉原夫餘紀』 : 始祖 解夫婁 在位三十九年乙未元年王爲北夫餘所制徙居迦葉原赤稱岔陵
29) 지양미(2013), 371쪽.
30) 우리말 ‘멋’의 선도적 의미는 ‘천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행위’이다. 이 행위의 총괄 관리자(director)는 ‘머더
쇠’이다. 머더쇠는 마당쇠로 의미가 변했다. 해모수의 우리말 발음은 ‘해멋’으로 ‘東明’과 의미는 비슷하다.
31) 『광개토태왕릉비』의 기록인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에서 ‘出自北夫餘’를 ‘북부여에서 탈출’로 해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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