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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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1
어 그를 바라보면 천왕랑(天王郞) 같았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고열가단군
재위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었다. 웅심산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궁궐을 지었다. 오우관
(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찼으며 5룡거(五龍車)를 타니, 따르는 이가 5백여 명이었다.
아침에는 정사를 돌보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19)
기사 8년(B.C.232년) 단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5가들을 회유하시니, 5가가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으로 받드니, 이분이 바로 북부
여의 시조이다. (『북부여기 상』) 20)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임술 57년 4월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
었다. …… 이 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는 은밀히 수유국과 약속하고 옛 도읍지인 백악산
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해모수의 명을 따랐다. 이
때에 해모수는 모든 장수를 봉하면서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번조선 왕으로 삼아 상하 운
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개 북부여의 발흥은 이때부터였다. (『단군세기』) 21)
위 사료들의 공통점은 임술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5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세
웠다는 사실이다. 구물단군 때부터 시작된 대부여는 단순히 국명만 변경된 것이 아니라, 단군의
권한은 약화 되고 삼조선의 권한은 강화되었기 때문에 5가의 권한도 리더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즉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모수가 탄 ‘5룡거’는 해모수를 도운 ‘5가’ 또는 ‘5소국(小國)의 후(侯)’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해모수가 정치 조력자 없이 단독으로 북부여를 세울 수는 없다. ‘5룡’의 의미는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북부여기』와 『단군세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변(政變 coup
d’État)을 일으킨 해모수는 오우관을 쓴 천왕랑 22) 출신으로 용광검을 지녔다는 것은 실권을 장악
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오우관은 배달국의 상징물이므로 ‘환웅의 귀환’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용광검은 용머리가 조각된 환두대도로 추정되며, 전통적으로 임금의
상징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자도 5가의 역할이 북부여 건국에 주요했음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
리고 해모수를 ‘종실’이라 한 것으로 보아 고열가단군과 혈통 관계임을 알 수 있다.
19) 『北夫餘紀 上』 :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
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
20) 『北夫餘紀 上』 : 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
21) 『檀君世紀』 : 壬戌五十七年四月八日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其先槀離國人也…… 先是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
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四境之內皆爲聽命於是封諸將陞須臾侯箕丕爲番朝鮮王往守上下雲障蓋北夫餘之興始此
22)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 源花稱女郞男曰花郞又云天王郞自上命賜鳥羽冠加冠有儀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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