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108
환단고기 분과 1
도두왕의 투항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 16년에 우태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투항한
왕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준 것이다.
3. 서부여
동부여 왕실은 대소왕 사후 해체되기 시작했다. 대소왕은 7형제의 장남이었는데, 막내는 추종
자들과 함께 갈사국을 세웠고, 사촌 동생은 1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했다.
5년(22)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선왕이 돌아
가시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기댈 데 없는데, 왕의 아우는 도피하여 갈사수에 도읍하였다. 나
역시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1만여 명과 함께 투
항해 오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
으므로 낙씨(絡氏)라는 성씨를 주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46)
위 사료에서 두 가지 사항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투항했는데, 왕으로 봉했다는 것과 다
른 하나는 연나부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태조 때 투항한 갈사국의 도두는 동부여후로 봉해
졌다는 사실과 비교될 수 있다.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부여왕으로 봉해졌다. 왕과 후(侯)는 왕족과
귀족의 차이를 의미한다. 대소왕 사후에 신흥패권국으로 부상 중인 고구려를 대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대소왕의 사촌 동생과 그 추종자들은 고구려와의 동맹을 통해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후자는 투항 세력이 기존 부여의 영토를 고구려의 그것과 맞바꾸는 과정으로 연나부에 안
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연나부가 나중에 서부(西部)로 명칭이 바뀌므로 고구려의 서쪽이라는 것
을 알 수 있다. 47)
고구려는 무리를 이끌고 망명한 대소왕의 사촌 동생에게 낙씨 성을 주면서 부여왕의 계승을 인
정해주었고, 연나부의 땅 일부를 내어주었다. 부여가 고구려 연나부에 안치되었다는 내용을 전하
는 모든 기록에서 동부여가 패망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자신의 막내 동생인 고추가 재사(再思)와 부여 공주를 혼인시켰다. 결혼동맹은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배신을 예방하는 방법이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자가 고구려 태조(재위
53~146년)이다. ‘安置’라는 단어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이 글자를 통해
멸망한 동부여의 망명자 집단으로 외형적으로는 고구려의 제후국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신흥강대
국인 고구려에 편승(bandwagon) 48) 하여 안보 위협을 없애면서 새로운 부여왕으로 인정받았다
46)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大武神王 : 五年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扵
曷思. 吾亦不肖, 無以㒷復.” 乃與萬餘人来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47) 『북부여기』 「가섭원부여기」에는 이 위치를 ‘개원 서북쪽’으로 전하고 있다.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