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5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105
부여 分國 과정을 논함 지양미
는 동부여로 밀려난 해부루의 직계 조상이고, 자칭 해모수는 고리국 33) 출신 동명제를 가리킨다.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단군 재위 27년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
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
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북부여기 하』) 34)
해부루를 밀어낸 새로운 정치세력이 고두막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에 의해 세워
진 북부여는 위만의 망명(기원전 195년)과 다음 해 위만의 배신으로 북부여의 서쪽 지역에 위만조
선이 세워졌다. 위만조선은 북부여와 한(漢)나라 사이에서 통교를 방해했다는 기록 35) 으로 미루어
북부여는 무역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역이 원활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국가 재정 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건국 1세기 만에 국가의 위상도 쇠퇴해졌을 것이다. 이때 한나라가 위만조선
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기원전 108년의 일이다. 한나라는 이어 북부여의 국경을 침략
하였고,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북부여 왕실 보다는 고두막의 활약에 민심이 기운 것은 당연한 결과
라 하겠다. 36)
우리 역사에서 ‘동명(東明)’이라는 시호(諡號)는 북부여의 고두막과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가 있
다. 고두막은 국난(國難)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고, 추모는 단군조선 이후 동북아의 강
력한 패권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를 세웠다. 해모수 – 고두막(東明) - 추모(東明聖王)로 이어지는 난
세 영웅들의 일대기는 중복 공유를 통해 하나의 콘텐츠로 완성되었고, 역사 기록과정에 그대로 적
용되어 혼란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시에 유행했던 ‘해모수 = 동명’ 신드롬은 스토리텔링
이 되어 『삼국유사』 편찬 시기까지도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
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시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
경우와 같다. ‘出自’는 ‘~출신, 탄생, 연원, 근원’이라는 의미이다.
32) 지양미(2013), 372쪽.
33) 『논형』 및 『梁書』에는 ‘橐離’로, 『魏略輯本』·『搜神記』에는‘槀離’로, 『法苑珠林』에는 ‘寧禀離’로 되어 있는데, ‘橐離’
의 誤記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黃銅之國의 의미로 이해하여 ‘槀離’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高離國은
貊族인 夫餘와 高句麗를 건국한 세력들이 갈라져 나온 貊族의 古代國家의 國號였다고 한다.(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 『北夫餘紀下』五世檀君 高豆莫(一云豆莫婁) 在位二十二年 “在帝位二十七年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北
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35) 『三國遺事』 「衛滿朝鮮」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했고 이후 손자 우거(안사고는 손자의 이름이 우거라고 했다.)
에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이 글을 올려 한나라 천자를 알현하려 했으나, 우거가 길을 막아 전하지 못했다.(안사고는
진은 진한을 말한다고 했다)(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36) 지양미(2013), 373쪽.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