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109
부여 分國 과정을 논함 지양미
고 볼 수 있다. 여러 문헌을 통해서 서부여는 군사권과 외교권, 그리고 교역권을 갖고 있었고 읍루
를 복속시켜 값싼 노동력을 확보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9) 즉 부여가 고구려의 제후국이 아니
기 때문에 한(漢)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패권국과의 편승동맹 관계는 안보를
보장받는 대신 패권국의 행보(전쟁 등)에 반드시 동참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즉 원치 않는 전쟁에
희생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패권국의 동맹국이 약소국이라면 그 관계가 불평등하
게 보일 수도 있다.
고구려에 의해 새로운 부여왕으로 즉위한 낙씨왕계의 부여가 서부여이다. 연나부에 있어서 연
나부여 또는 연나부부여라 할 수도 있지만, 부여가 고구려의 제후국이 아닌 동맹국이었고 위구태
왕 때 요서 지역으로 천도하여 기록상 5세기까지 존속하므로 ‘서부여’로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
고 생각한다.
… 마침내 옛 도읍의 백성 1만여 인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고구려가 그를 부여왕으로
세워 연나부에 소속시켰다. 그 등에 줄무늬가 있어 낙씨(絡氏) 성을 하사하였다. 그 후 67년 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11년(68, 고구려 태조왕 16)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 전체를 바쳐
고구려에 복속해왔다. 갈사가 마침내 끊어지고 부여도 후에 점점 자립한 나라가 되었다.(이종휘
『東史』) 50)
부여의 투항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내용을 저본으로 삼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패망한 동부여 왕실 출신의 두 사람이 각자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
다는 기록이지만, 낙씨왕은 항복하였고 도두는 나라 전체를 바쳤다는 차이가 있다. 이 사료의 내용
을 부여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낙씨왕은 새로운 부여의 왕으로 인정받은 것이고, 갈사국은 멸망했
음을 알 수 있다.
서부여의 건국 과정 역시 분국의 조건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동부여의 국난 위기 상황에서
위기 해결에는 두 가지 선택 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선택이다.
위기의 역사에서 흔히 대립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왕의 빈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
이다.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고구려와의 화친을 선택하며 왕이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은 평화적 합
의로 이루어졌고, 낙씨왕은 동부여 왕실과 혈연관계였으며, 연나부가 위치한 곳에 새로운 부여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분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8) 편승동맹관계이론은 랜들 스웰러(Randall Schweller)가 주장한 현대국제정치이론에서 신고전적 현실주의(neo
classical realism)라 불린다. 편승동맹은 안전과 함께 자신의 팽창주의적 이익까지 추구하는 현상타파 국가들간의
동맹이다.
49) 지양미(2022), 44쪽.
50) 이종휘 저/ 김영심·정재훈 역주, 『동사』, (소명출판, 2004) 60-61쪽.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