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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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分國 과정을 논함 지양미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기원전 425) 3월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
는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
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아,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
선이라고 바꿔 불렀다.(『단군세기』) 14)
단군이 다스렸던 조선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변경했고, 기존의 국명이었던 조선을 삼한이 사
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한이 조선으로 승격되었고 그 위에 ‘대부여’는 최고의 상징적 가치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반대로 지방정부인 삼한의 권한이 중앙정부였던 조선의 권한만큼
커졌다는 의미가 된다. 즉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 되었다는 것으로 통치체제의 변화가 있었음
을 암시한다. 이때가 조선이 개국한 지 1908년이 된다. 『삼국유사』 등의 사료에서 ‘단군이 1908
세에 산으로 들어갔다’ 15) 는 기록과 일치한다. 즉 단군왕검이 열었던 ‘조선’의 역사는 그 시점에서
끝이 났고, ‘대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여는 여전히 단군의 나라였고 강화된 지방
권력을 이용해 세력을 잡은 해모수는 민심을 잡고자 단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북부여’를 건국했
다. 16)
해모수의 등장과 북부여의 건국에 관한 사료는 『삼국유사』와 『북부여기』 그리고 『단군세기』가
있다. 『삼국유사』와 『북부여기』에는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에 대해 천부(天符)의 권한을 받은 정
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메타포(metaphor : 상징적 표상)가 사용되었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전한서』 17) 에 선제(宣帝) 신작(神爵)3년 임술년 4월8일에 천
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라고 했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고 아들을 낳아 부루라 했는데, 해(解)를 씨로 삼았다.
(『삼국유사』 북부여) 18)
임술 원년(B.C.239) 단제는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용감하시니, 신령함은 사람을 꿰뚫
14) 『檀君世紀』“四十四世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三月大水浸都城賊大亂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不戰自潰 遂斬
于和沖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 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
15) 『三國遺事』古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16) 지양미, 「부여 건국과정과 도읍지 위치에 관한 문헌 연구」, 『선도문화』 15(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3.8)
370쪽.
17) 중국 전한의 역사를 기록한 책.전 120권.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로, 후한의 반고(班固 : 32~92)가 82년(建初 8)
무렵에 완성했다.
18) 『三國遺事』 「北夫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募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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