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100
환단고기 분과 1
을 세우고 재세이화(在世理化)하여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을지어다.”(『삼성기전 하편』) 10)
이 문장에서 안파견은 지위리환인으로 환인과 환웅 사이에 천부인을 통한 평화적 권한이 부여
되기 이전에 5가의 동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국의 목적이 ‘홍익인간 재세이화’
임을 천명하고 있다. 5가의 동의는 만장일치제를 근간으로 하는 화백회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환웅의 분국은 5가의 적극적 지지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5가’로 알려진 상고시대의
독특한 정치행정체제는 부여와 고구려에도 이어졌다.
Ⅲ. 부여의 분국 과정
부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부여가 존재했고, 나라 이름에 방위 또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특징
이 있다. 방위나 지명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부여가 단순히 도읍지 천도를 통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통치 세력을 포함한 정치환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여의 변
천 과정을 위에서 제시한 분국의 조건을 적용하여 분석함으로써 부여사 연구의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1. 북부여
북부여는 해모수가 임술년 4월 8일에 세운 나라로 『삼국사기』 11) 와 『삼국유사』에서는 최초의
부여를 북부여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북부여’라는 명칭에 의문이 생긴다. ‘북부여’는 ‘북쪽의 부
여’ 또는 ‘부여의 북쪽’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므로 ‘북부여’ 이전에 기준점
이 되는 ‘부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군세기』 12) 에 전하는 ‘대부여’의 존재를 참
고할 필요가 있다. 13)
10) 『三聖紀全下篇』 桓國之末, 安巴堅, 下視 三危太白, 皆可以弘益人間. 誰可使之. 五加僉曰, 庶子 有桓雄, 勇兼仁智, 嘗有
意於易世以弘益人間, 可遣太白而理之. 乃授天符印三種, 仍勅曰如今, 人物業已造完矣. 君勿惜厥勞, 率衆三千而往, 開天立
敎, 在世理化, 爲萬世子孫之洪範也.
11)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현존하는 한국 고대사의 최고(最古) 역사서로,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 등이 1145년
(인종 23)에 완성하였다. 기전체 형식으로 본기(本紀), 표(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다.(출처 :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해제)
12) 1363년 이암이 단군조선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로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기 桓檀古記≫에 수록되어 있다. 일찍
이 이암은 고려시대 ≪진역유기 震域遺記≫를 저술한 이명(李茗)과 ≪북부여기 北夫餘記≫의 저자 범장(范樟) 등과 더불
어 경기도 양주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다가 태소암(太素庵)에서 진기한 고서(古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때 얻은
고서를 읽고 이 책을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1세단군(서기전 2333)부터 47세단군(서기전 295)까지의 2,000여 년간의
실록을 기록하고 있으며, 북부여 해모수(解慕漱)의 건국(서기전 239) 사실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전)
13) 지양미(2022), 41쪽.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