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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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分國 과정을 논함  지양미



                 표기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                   40) 는 『위략(魏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

                 은 주석을 달았다.



                    옛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 - 고리(槀離)를 후한서에는 색리(索離)라고 기록하고 주(注)에서
                    는 색의 발음은 탁(度洛反)이라고 하였다. 『통전』에는 탁리(槖離)로, 『양서(梁書)』에는 고리

                    (櫜離)로 기록하였는데 고구려라고 할 때의 고려(高麗)가 아니다. 『수서(隋書)』에는 고려(高麗)
                    라고 하여 같은 나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41)



                   고리국은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탁리나 색리로 적었으나 모두 같은 나라이며 고구려와는

                 다른 나라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42)  이상의 사료를 통해 북부여의 새 왕이 된 고두막은 북부여
                 왕실과의 혈연적 관계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해부루와의 평화적 합의와 새 도읍지로의 천도를

                 추진했다는 점과 ‘부여’ 국명을 계속 사용했다는 점에서 분국의 조건에 부합한다고 본다.
                   북부여에서 분국한 동부여는 독립된 국가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2개의 부여가 존재하

                 면서 ‘북쪽과 동쪽’이라는 방향성을 나타내는 국명 외에 각 부여의 도읍지를 일컫는 ‘졸본’과 ‘가섭
                 원’부여로 불렸다는 점도 분국 후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증거가 된다. 즉 오늘날 한반도에 있

                 는 국가를 ‘남한 · 북한’, ‘남조선 · 북조선’, ‘서울 · 평양’으로 부르는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43)

                   북부여 또는 졸본부여는 동부여를 탈출한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할 때까지 존속했고, 동부여는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죽임을 당한 뒤 왕실의 일부 세력이 새로운 부여로 분국하면서 와

                 해되었다. 『광개토태왕비』에 기록된 동부여는 대소왕 사후에 대소의 막내 동생이 세웠던 갈사
                 국 44) 이 손자 도두왕에 이르러 고구려에 항복하자, 태조가 도두를 우태라 부르고 동부여 후(侯)에

                 봉했던 그곳이다. 고구려 제후국이었던 동부여로 해부루 – 금와 – 대소로 이어진 분국 동부여와는
                 다르다.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 고구려는 도두

                    를 우태(于台)라고 부르도록하고 …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섭원부여기』)                        45)



                 40) 淸 건륭43년(1777)에 황제의 명령으로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대부터 17세기 초까지의 만주 역사를 정리한
                 관찬사서이다.
                 41) 『滿州源流考』魏略 “昔北方有槀離之國 接 槀離 後漢書作索離 注云 索音度洛反 通典作고리 梁書作櫜離 非高句麗之高
                 麗也 惟隋書 直作高麗 合爲一國 誤”
                 42) 지양미(2013), 375쪽.
                 43) 지양미(2022), 41쪽.
                 44) 신채호는 갈사국을 갈사부여라 하였는데, 대소왕의 막내동생과 추종자 1백명이 사냥 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그
                 백성을 빼앗아 세운 나라로 부여분국과는 관련성이 없다.
                 45) 『迦葉原夫餘紀』 : 都頭王見高句麗日强遂擧國自降…都頭爲于台…封爲東扶餘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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