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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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1
【주제어】 북부여, 동부여, 서부여, 분국(分國), 분국의 기원, 분국의 조건
Ⅰ. 머리말
역사적으로 부여는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료의 부족
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학계에서 외면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 이후 열국 시대의 중심 국가였
던 부여는 방위 또는 지역명을 달리하면서 기록상으로는 5세기까지 실재했던 한민족의 역사로 이
어진 나라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양한 부여가 존재했다고 전해지기는 하나, 해모
수왕과 해부루왕, 금와왕과 대소왕 그리고 고구려에 의해 부여왕으로 봉해진 낙왕 외에 자세한 왕
력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삼국지』 등 중국 사료에는 위구태왕을 비롯한 의려왕 · 의라왕 등 소수
의 부여왕의 이름과 역사적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어, 부여의 문화와 위치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해 해모수왕과 의라왕은 약 5백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으며, 그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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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부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북부여와 동부여, 졸본부여와 가섭원부여, 연나부 부여
와 서부여 그리고 남부여가 있었다.
이들 사료 외에도 여말선초의 실존 인물인 복애 범장의 『북부여기』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일십당 주인 이맥의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통해 잃어버린 부여사의 주요 내용을 접할 수 있
으며, 조선 중기 이후 실학자들이 편찬한 역사서와 다양한 개인 문집에서도 부여사는 전해지고 있
다. 2천여 년 전에 존재했던 부여에 관한 문헌 기록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다고 생각
한다. 특히 『북부여기』는 북부여와 동부여의 상세한 역사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오랜 역사에서 ‘한국 · 조선 · 고려’의 국명(國名)은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의 간격으로
반복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후대 국가가 선대 국가의 영광과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었고, 대외적으로도 계통성과 역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여는
북부여로부터 남부여에 이르는 동안 기본적으로 ‘부여’라는 국명을 계속 유지하였다. 대외적으로
는 오로지 ‘부여’로만 인식된 것으로 보아 ‘방위 + 부여’의 구분은 대내적인 구별이거나, 혹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편의상 정리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연구자는 북부여로부터 남부여에 이르는 부여 변천 과정을 추적 분석한 결과, 왕권 시대의 일반
적인 권력 투쟁 및 쟁취가 아닌 독특한 정권 분리의 행태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마치 종중(宗
中)에서 지파(支派)가 분가하며 이룬 일족(一族)인 문중(門中)의 관계와 유사하여 이를 ‘분국(分國)’
2)
이라 정의하였다.
1) 지양미, 『요서지역 부여 세력의 일본 열도 진출에 대한 융합적 고찰』(인하대학교대학원 융합고고학과 박사학위논
문, 2022)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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