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대한사랑 11호
P. 24

『대명일통지』는 명(明) 초기에 자국의 영토와 주변국의 현황을 정리한 지리지
            다. 요양지역이 고조선의 왕험성이고 낙랑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명은 언제든 이동한다. 지리지에서의 지명
            에 대한 기록은 언제나 당대의 지명 위치를 기준으로 그때까지의 연혁을 적는다.

            고구려의 평양을 기록한 위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도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이 한
            반도가 아닌 요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원사·지리지』 기록에서 평양이 한 곳이 아니었고, 현재의 압록강도 고
            구려 시대의 압록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천
            리 떨어진 곳에 평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세종에 이르러 조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
            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사업은 조선의 영토 안에 선대 역사의 표식물을 설치

            하는 것인데, 그 설치 장소는 각각의 왕성이었다. 그런데 평양의 위치는 알 수 없
            었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 시조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이겠고, 백제는 전주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年 3月 13日)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시 조선 영토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황

            제들이 서경을 자주 다녔는데, 그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면 조선 초에 그곳을 모
            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학자들은 식민사관을 구축하기 위하여 한국과 중국
            의 수많은 사료들을 검토하였다. 이들이 위의 사료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아무런 고증도 필요하지 않다’
            라는 한 문장으로 우리의 역사지리를 이렇게 왜곡해 놓았던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대의 평양이 요양이라면 압록강(鴨淥江)도 당연히 다시 살펴야 한
            다. 최근의 연구에서 고구려 시대의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遼河)임이 밝혀졌다. 따

            라서 통일신라의 강역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2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