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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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고려의 서경이 고구려의 평양이고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어떤 고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조선역사지리』, 야나이 와타리箭內亙)



                        일제는 평양의 위치를 중시하였다. 고구려의 평양을 확정지으면 자연스럽게

                      통일신라와 고려의 영토도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현 평안도의 평양이
                      곧 고구려의 평양이요, 고려의 서경이라고 확정한 것이다.

                        고구려는 모두 8번에 걸쳐 천도(遷都)를 하였는데, 현재의 중국 요녕성의 집안
                      (集安)시와 평안도의 평양(平壤)을 오간 것으로 배웠다. 두 곳으로만 반복하였다는
                      기록도, 평양은 한 곳이었다는 기록도 없건만 어찌 현재의 평양만이 맞는다고 할

                      수 있는가.



                      2. 고구려 평양의 위치
                        고려의 서경은 반란이 상존하는 지역이었다. 『원사』의 기록을 보면 이때 원에
                      귀부한 고려의 땅을 원은 동녕로(東寧路)에 편입시키고 아래와 같이 기록해 놓았

                      다.



                           동녕로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이라고 했다. (중략) 진(晉)
                          의희(義熙) 이후 그의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주했다. 당이 고

                           구려를 정복하고 평양을 빼앗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鴨
                          淥水) 동남쪽으로 약 천리 떨어진 곳인데 옛날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

                          때에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고 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이연
                          령, 최탄, 현원렬 등이 부(府)·주(州)·현(縣)·진(鎮) 등 60개의 성을 이끌고 귀

                           부했다. 8년에 서경이 동녕부(東寧府)로 개칭됐다.(『원사·지리지』 「동녕로」)


                        고련은 고구려 장수왕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요양

                      (遼陽)이다. 이는 아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라고 하며 기자의 고국(故國)
                          이다. 성 밖에는 기자묘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 치소였는데 진(晉) 의희(義

                          熙) 이후 왕 고련이 이 성에 처음으로 기거했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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