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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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내용을 보면 조선인 소동 140명, 화재 68명, 바람 35명, 도망으로 인한 혼
            잡 17명 순이었다. 당시 어린이들이 최대의 공포로 느낀 것은 대지진과 화재의

            두려움보다 군대와 경찰, 자경단이 조선인을 뒤쫓아 죽이는 아수라장의 광경이
            었다. 과연 관동대지진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대지진으로 인해 흔들릴 천

            황 중심의 제국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하고 조선인 출신
            의 노동자와 유학생들을 탄압, 학살한 것이다. 우리가 101년 전 관동대지진에서

            기억할 것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7천 명이 학살당한 끔찍한 제노사
            이드 사건이다.



            조직적인 조선인 사냥꾼들



                우리 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

                다”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라고 묻자 “상관

                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 일본 육군 소장 쓰노다 고레시게의 증언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81쪽 재인용)



              일본 군대, 경찰, 자경단원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살해했을까? 계엄령

            을 선포한 이후 경찰은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경찰권이 미치지 못한
            곳은 재향군인과 청년단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민간 경찰인 자경단이 조직되었
            다. 계엄사령부는 유인물, 회람, 포스터 형식으로 일반 국민들의 참가를 촉구하

            면서 이른바 ‘조선인 사냥’을 시작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백묵으로 옆집의 문이나 담벼락에 표시해 놓

            은 부호의 의미는 그림1)과 같다.



              일부 연구자들이 당시 자경단원의 행동은 제국주의에 물든 일부 민중의 편견
            의 소산이라거나 관헌의 교사(敎唆)·선동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

            데 자경단이 경찰이 지정한 곳 이외의 지역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통행인에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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