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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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태왕은 전교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적(倭賊)이 가득히 모여 있다가

                      고구려의 군사가 이르자 후퇴를 하였다. 고구려군이 “도망간 자취를 밟아 바다
                      를 건너 등 뒤로부터 협공을 하면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

                      拔城)에 이르렀다(躡跡而越하야 夾攻來背하야 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이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는 후퇴하는 왜(倭)의 후미를 공격하면서 바다를 건너 대

                      마도에 상륙하여 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지금의 강단사학자들 대부분은 여
                      기의 임나가라(任那加羅)를 김해 가락국의 국성(國城)으로 보고 있다. “왜군이 경주
                      로부터 멀리 떨어진 김해방면까지 도망해왔다는 것은 왜군이 원래부터 임나가라

                      의 지원에 의존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여 아직도 임나(任那)와 가
                      야를 동일시하는 식민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임나에 대해 다음의 3가지로 정확하게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
                      다. 첫째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 둘

                      째 대마도 두 섬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자 임나는 대마도 전체의 명칭이 되었
                      다. 셋째 CE 400년 대마도가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대마도와 구주(九州) 그리고

                      주위의 10개 나라가 연정(聯政)을 폈지만, 임나 10국을 모두 고구려에서 직할(直轄)
                      하였다.

                      임나 10국은 바다에 3국, 구주(九州)에 7국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임나의 명칭이
                      대마도를 넘어 구주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은 지금 대마도 동북쪽에 있는 악포(鰐浦)를 가리킨다.


                      9) 광개토열제의 일본정벌

                      이 부분은 현재의 탁본에서 대부분이 마멸되어 있는데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의도적으로 훼손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다행히 「무술등본(戊戌謄本)」을 통해서 대

                      부분이 복원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큐슈 대우국의) 시라성과 도성(都城)을 함락시킬 때 왜적이 성에 가득했으
                          나 왜적이 무너지니 성이 여섯 번이나 우리의 공격을 받고 탕멸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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