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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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한 것이다.
셋째, 이위신민(以爲臣民)을 ‘고구려의 신민으로 여기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한문
에서 ‘이위(以爲)’는 ‘…으로 여기다’라는 뜻이 있다. 신라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여
겼다는 해석은 이 구절의 첫 문장인 ‘백잔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받쳤다’라는 말과 수미(首尾)가 상합한다. 이위(以爲)를 ‘여기다’라고 해석한 것은
정인보 선생의 해석과 동일한 것으로, 이러한 해석만이 ‘왜가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왜곡된 해석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정확한 해석
이 된다. CE 399년 왜는 백제의 사주를 받아 다시 신라의 도성을 침범하는데 백
제의 용병으로 활동하는 왜가 백제까지 격파하고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일
본사람들의 해석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4. 광개토태왕 비문과『환단고기』의 정합성
정합(整合)이란 ‘가지런하게 2개가 딱들어 맞는다’는 뜻이다. 광개토태왕 비문
은 금석문이다. 금석문은 당시의 상황을 돌에 새겨서 기록한 것이므로 문서로 기
록된 어떤 사료보다도 정확성이 뛰어나다.
『환단고기』에 대해 강단사학자들은 지엽적인 문구 등을 트집 잡아 위서로 매도
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관을 답습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환단고기』의 내용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CE 414년에 새겨진 광개토태왕의 비문 내용이 『환단고기』와 정합한다면 『환단
고기』가 진서(眞書)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필자는 10가지 방면에서 태왕비
문와 『환단고기』의 정합성을 찾아내어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1) 출자북부부여(出自北夫餘)
광개토태왕 비문의 첫머리는 “옛적 시조이신 추모왕께서 나라를 창건 하실 때에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에 出自北夫餘라)라고 하였다. 강단사학
자들은 북부여를 나라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여를 기준으로 후세에 북부여, 동부
여, 남부여로 분파해 나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에 대한 이러한 인
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환단고기』의 「북부여기」를 보면 BCE 239년 해모수
가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BCE 58년 고주몽은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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