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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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학자들도 평양을 포함하여 고구려 도읍지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하
            였다. 박지원, 최덕중, 김경선 등은 만주중심설을 주장하였고, 안정복, 한진서,

            정약용 등은 한반도 중심설을 주장했다. 한반도 중심설의 주장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학자들에 이어지고 오늘날 고구려 도읍지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졸본을 환인으로, 국내성과 환도성은 집안으로, 평양성은 지금
            의 평양으로 비정하고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 현재 한국사의 실정

            이다. 평양성은 한국 교과서 및 일본의 교과서 모두 현재의 평양으로만 줄곧 기
            술해 오고 있다. 역사학계는 평양에 관련하여 기존의 사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
            지 않고 새로운 기록들이 발견되어도 이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






            2. 평양성의 진짜 위치는 어디인가?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근거들을 살펴보자.



             (1)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 복기대 교수가 밝힌 몇 가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역도원의 『수경주(水經註)』
              중국사료 중 가장 오래된 평양기록은 역도원의 『수경주(水經註)』이다. 이 책은

              2~3세기 경 중국 남북조 시대에 상흠이 저술한 『수경(水經)』이라는 지리서에 북
              위의 역도원이 주석을 단 것이다. 이 주석의 작성 시기는 6세기 경으로 추정된

              다. 『수경(水經)』에는 낙랑군의 위치를 고증하는 과정에서 패수의 위치를 다음
              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패수는 낙랑현과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으로 바
                 다에 들어간다.(『수경(水經)』)


              이에 대해 역도원은 『수경주(水經註)』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筍彘討右渠, 破渠於浿水遂滅之.若
                 浿水東流,無渡浿水之理.其地今高句麗國治,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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