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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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9



                      1. 비문의 유래와 재발견

                        광개토태왕(생애. 374~412) 비(碑)는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이며 경세군주였

                      던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열제(재위. 391~412)의 업적을 그의 아들인 장수열제가
                      그의 사후 2년 뒤인 414년에 세운 공적비이다.

                        광개토태왕의 사후 정식명칭은 비석의 제1면에서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
                      태왕(國罡上 廣開土境 平安好太王)’이라 하였고 제4면에서는 평안(平安)을 빼고 ‘국강상
                      광개토경 호태왕’이라 하였다. 국강상(國罡上)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데, 강(罡)을 단순히 언덕강(岡)으로 해석하여 왕릉이 있는 장소 즉 ‘도읍인 국내성
                      언덕 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은 강(罡)은 북두칠성을 뜻하므로 ‘돌

                      아가신 뒤 북두칠성이 되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를
                      널리 개척하였다는 뜻이고 평안(平安)은 평천하(平天下)하고 안백성(安百姓)했다는 뜻

                      이며, 호태왕(好太王)의 호(好)는 ‘위대하신, 훌륭하신’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위
                      대하신 태왕님’으로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청나라때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
                      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정책을 실시하여 1880년경에 이르러 재발견 된다. 능비(陵
                      碑)는 정면에서부터 왼쪽으로 돌아가며 4면에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제1면

                      은 11행이고 제2면은 10행이고 제 3면은 14행이고 제 4면은 9행으로 모두 44행
                      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행은 모두 41자로 이루어져 44×41=1,804자가 나오나,

                      제 6행만은 기사왈(其詞曰) 아래 2글자를 빼고 위로 올려 써서 총 1,802자로 구성
                      되어 있다.

                         한국에서 인터넷 또는 박물관 등의 공식 문서에 총 글자 수가 1,775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2. 일제의 마멸과「무술등본」


                        이 비문의 전문이 알려진 것은 일본 아세아협회(亞細亞協會)가 1889년에 발행한
                      『회여록(會餘綠)』 제5집에서였다.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사
                      코 가게아키(酒匂景信) 중위가 제공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능비 탁본이었다. 쌍

                      구가묵의 쌍구(雙鉤)는 비문(碑文)이나 이미 탁본한 대본 위에 다시 종이를 대고 글
                      자 주변을 선으로 그려 복사하는 것이고 가묵(加墨)은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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