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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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CE 49년,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했다.
(『후한서』)
CE 77년 태조무열제 25년,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이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고 했다.(『삼국사기』)
CE 105년 태조무열제 53년, 부여의 사신이 와서 꼬리가 없는 호랑이를 바쳤다고
했다. (『삼국사기』)
이상의 기록에는 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CE 111년 후한 안제 영초(永初) 5년 부여왕 시(始)가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
리고 낙랑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고 후에 다시 귀부(歸附)하였다.
(『후한서』)
CE 120년 안제 영녕(永寧) 원년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
므로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주었다. (『후한서』)
CE 136년 순제 영화(永和) 원년 그 임금이 경사에 와서 조회하자 천자는 황문(내시)
으로 북치고 피리를 불게 하며 씨름을 하게 하여 관람시켰다. (『후한서』)
CE 167년 영강(永康) 원년 왕 부태(夫台)가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략
하였다. (『후한서』)
『삼국지』에서는 당시 발해 동쪽의 군벌이던 공손도(公孫度)가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의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하여 맏딸(宗女)로써 처를 삼게 했다고 했는데, 위구태(尉仇
台)에게 시집보낸 듯하다. 위구태가 죽자 위거(位居)를 간택해서 세웠다고 했고(간위거(簡位
居)를 임금의 이름으로 보기도 하나 『통전』에 ‘위거’라 하여 이를 따랐다.) 『통전(通典)』에서는 위구태가
죽자 손자 위거가 이어서 즉위했다고 했다.
위거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서자 마여(麻餘)를 세웠다. 정시(正始, 240~248)년간에 유
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군량을 공급하였다. 마여가 죽고 아들
의려(依慮)가 나이 6세에 임금이 되었다.(『삼국지』)
CE 285년 태강(太康) 6년 모용외(慕容廆)에게 격파되어 왕 의려가 자살하였고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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