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P. 71
2024. 7·8
이르러 도두왕(都頭王)이 CE 68년 태조무열제에게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를 ‘북갈
사’라고 부른다.
일곱 번째 부여는 고구려가 도두왕을 고구려의 제후인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해준 것
에 기인한다. 고구려 『삼국사기』 <대(태)조대왕조>를 보면 “16년(CE 68) 8월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도두왕을 우태(于台, 직책의 명칭, 優台라고도 쓴다)로
삼았다”라고 하였고, 『북부여기』에서는 “도두왕이 항복하자 도두를 우태로 삼아 살 집
을 주고 혼춘(琿春)을 식읍으로 주어 동부여후로 봉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를 ‘남갈사’라
고도 부른다.
여덟 번째 부여는 ‘서부여’이다. 서부여라는 말은 후세에 그 위치가 북부여 또는 동부
여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구분하기 쉽게 부르는 말이고 ‘연나부(椽那部) 부여’ 또는 ‘낙씨(絡
氏)부여’라고도 부른다. CE 22년 7월이 되자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동부여의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에서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살게 하였다. 또
그의 등에 띠 같은 무늬가 있어 낙씨 성을 내려 주었다. 그 후에 자립하여 개원(開原, 장당경
아사달) 서북에서 백랑산(白狼山, 백록산(白鹿山), 태양산(大陽山)이라고도 한다. 요령성 객좌현성에서 남서
쪽으로 26km 떨어진 대릉하 서쪽 강변에 있다) 계곡으로 옮겨가 후한(後漢), 삼국의 위(魏)나라, 진
(晉)나라 등과 교류하면서 나라를 유지하였다. 그 뒤 CE 494년 고구려 문자열제 때 고구
려에 항복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문자열제 3년 2월에 부여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
어 항복했다”고 하였다. 해모수가 기원전 239년 북부여를 건국한 아래 서부여가 망하는
494년까지의 역년이 733년이나 되는데 우리는 이 역사를 잊고 살아온 것이다.
아홉 번째 부여는 ‘남부여’이다. 백제 성왕(재위 523~554)은 고구려와의 충돌이 심해지자
성왕 16년 (538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국호를 한 때 남부여라
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69
월간대한사랑_8,9호_본문(인쇄).indd 69 2024-07-22 오후 1:4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