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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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세 모수리 단군(BCE 195~170), 3세 고해사 단군(BCE
                                                    170~121), 4세 고우루 단군(BCE 121~87)을 거쳐 전기
                                                    북부여를 매듭짓고 후기북부여로 연결되며 동부여

                                                    로 분화된다.

                                                      네 번째 부여는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라고

                                                    부르는 동명왕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세운 부여이다.
                                                    고두막한은 서압록(西鴨綠, 서요하) 출신으로 47대 마

                                                    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BCE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김산호 화백
                                                     108년 한무제는 북부여를 침략하였다. 고우루 단
                                                     군이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자 고두막한은 의
                    병을 일으켜 한무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BCE 108년 졸본(卒本)에서 즉위하니 이를 졸본

                    부여라고 부르고 고두막한의 호(號)가 동명(東明)이어서 동명부여라고도 부른다.
                      『삼국사기』의 기록 때문에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성제를 동명왕으로 알고 있으나 이
                    는 잘못된 것으로, 연산군 때 사람인 김천령(金天齡)이 지은 부(賦)나 1922년에 발견된 연

                    남산(淵男産)의 묘지명에서 분명하게 두 사람을 구별하여 기록하고 있다. 고두막한은 서
                    요하를 건너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고리국(稾離國)의 옛 땅인 서안평에까지 이르렀다.

                    세력이 커진 고두막한은 BCE 86년 해모수의 후손 해부루를 제후로 강등시켜 차릉(岔陵)
                    으로 이주해 살게 하니 이것이 ‘동부여’이다. BCE 86년 이후를 후기 북부여라고 부른다.



























                          동명왕 고두막한 ©김산호 화백          『삼국유사』에도 동명제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계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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