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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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기 때문에 우선 이에 대해 정리를 하고 서부여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해보고자 한다.


                 첫째, 부여라는 말은 초대 단군의 넷째아들 ‘부여’에서 시작된다. 초대 단군은 부루(夫
               婁), 부소(夫蘇), 부우(夫虞)와 막내아들 부여(夫餘)를 두었는데, 부루태자는 단군조선의 2대
               단군이 되셨다. 『규원사화』를 보면 “부소, 부우와 막내 아들 부여를 모두 나라의 서쪽 땅

               에 봉해 주었다”고 하였고, 『동사강목』에 “이로 인해 초대 단군께서 막내아들 부여에게
               봉해준 땅을 후세에 저절로 부여라고 불렸고, 또 부여를 처음 봉해준 땅의 명칭이 되었

               다.”라고 하여 부여가 지명이 붙여졌다. 『단군세기』 <21세 소태(蘇台) 단군 조>를 보면 “우
               현왕 색불루가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夫餘新宮)에서 단군으

               로 즉위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막내아들 부여를 부여후(夫餘侯)로 봉한 곳이
               고,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로서 지금의 만주 농안(農安)의 장춘(長春)

               지역이다. 이것이 최초의 부여이고 원시부여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여는 ‘대부여’이다. BCE 425년 우화충(于和冲)의 반란을 평정하고 44세 단

               군에 오른 구물(丘勿)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하고,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변경하
               였다. 대부여는 단군조선의 제3왕조 시대로 단군조선이 막을 내리는 47세 고열가 단군
               58년, 즉 BCE  238년까지 188년간 지속되었다.


                 세 번째 부여는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에 해

               당되는 ‘북부여’이다. BCE 239년 해모수는 웅심
               산(熊心山, 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병하여 대부여

               의 옛 도읍지였던 백악산 아사달을 차지하고 북
               부여를 건국하였다. 북부여라는 명칭은 당시 남
               쪽에 대부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

               유사』를 보면 분명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였다”
               하여 북부여가 국호임이 분명하지만, 강단사학

               계에서는 북부여를 국호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는 해모수가 나라를 건국한 임술년을
               BCE 239년이 아닌 BCE 59년이라고 하여 180년

               을 내려서 기록하였다.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는 2                              『삼국유사』<북부여조>
                                                                    (국호가 북부여라고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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