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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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그렇다면 부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한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조선에 출사하지

                   국의 사료는 없을까. 한국의 사서인 『삼국유                  않은 충의로운 역사적인 인물인데, 범장의
                   사』와 『삼국사기』에서도 부여는 물론이거니와                  『북부여기』 편찬에는 소전거사(素佺居士)라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남부여 등의 다양한                배후의 손길이 있었다. 『태백일사』의 기록
                   부여를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연구자                   에 따르면, 범장이 이명 그리고 이암과 함께

                   들이 자국의 사료를 경시하고 중국의 사서                    천보산 태소암에 머무를 때 소전거사에게서
                   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까닭에 부여의 실상                    환단시대 이후로 전해 내려오던 우리 고유
                   을 드러내는 작업이 지지부진하다고 할 수                    의 사서와 신교정신을 담고 있는 많은 비장

                   있다. 여기에 더해 『삼국유사』는 <북부여 조                 서적을 전수받게 된다. 이로써 한민족의 뿌
                   >와 <동부여 조>에서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                  리 역사와 정신세계를 더 소상히 알게 되었

                   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다소 간략                   고, 국호만 살아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
                   하고 함축적이어서 전체 맥을 잡거나 인물                    려의 현실을 통탄하면서 이암·범장·이명은

                   간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한                    한민족사를 되찾을 것을 굳게 결의하게 된
                   몫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                  다. 이것이 ‘3인의 역사광복 결의동맹 사건’이

                   국사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여러 부여는 중국                   다. 그리하여 이암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사료에 등장하는 ‘부여’라는 두 글자로 평정되                 『북부여기』 상·하를 저술했고, 이명은 조선
                   고 말았다.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의 저본이

                                                             된 『진역유기』 3권을 쓰게 되었다.
                                                               범장이 남긴 한민족사의 소중한 기록인 『북
                   2. 부여사의 전모를 밝혀주는 『북부여기』와
                                                             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
                   『가섭원부여기』
                                                             을 담고 있어 사료로써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부여사를 복원함에 있어

                   북부여, 동부여, 갈사부여, 서부여 등 여러                    첫째, 여러 부여의 역사를 기술하여 부여
                   부여를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부여사의 전모                    의 총체적인 역사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를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보서(寶書)가 있                    둘째, 북부여의 건국 시조인 해모수의 실
                   으니, 바로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이 저               체를 처음으로 밝힌다. 『삼국유사』에서 해

                   술한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이다.                    모수는 베일에 쌓인 수수께끼의 인물이지
                     범장은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만, 『북부여기』는 북부여의 건국자로서 해

                   뜻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                    모수를 역사 속 실존 인물로 전하고 있다.
                   킨 ‘두문동 72인’ 중 한 분이다. 신하는 두                  셋째, 한 무제의 침공을 막아낸 구국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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