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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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통 계보를 계산하면 17세손이 됨을 알 수 있다. 두는 형태였다. 그 말은 곧, 위만조선이 성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이 세운 금석문 립하려면 시기상으로 따져볼 때, 망명자 위
임을 감안할 때 당대 고구려인들이 북부여 만이 고조선 멸망 후 진한이 자리했던 만주
를 계승한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 지역에 들어선 북부여를 통치할 때 가능한
한 사료가 된다. 것이다. 하지만 위만은 북부여로 피난 온 것
북부여사의 복원으로 얻을 수 있는 역사 이 아니라,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의 진실은 이뿐만이 아니다. 위만조선의 실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을 막는 방파제 구실
태를 파악하고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인 고 을 하던 번조선 땅으로 망명을 했다. 당대에
두막한을 되살릴 수 있으며, 북부여에서 국 북부여는 해모수가 다스리고 있었고, 번조
통이 고구려로 계승되는 과정과 더불어 최 선은 부단군 중 한 분인 기준 왕이 통치하
숭의 낙랑국과 남삼한의 형성에 대해서도 고 있었다. 기준이 위만을 결국 품어주지만,
고찰할 수 있게 된다. 이후 위만이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
모두 번조선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위만조선
1) 위만조선은 성립하는가 은 성립할 수 없고 ‘위만정권’이라 칭해야 합당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조선 하다 할 것이다.
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일
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
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
요, 그 이후에 동·북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
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緖論)을 얻지 못할
것”이라 서술하였다. 삼한·삼조선에 대한 이
해가 한민족사를 관통하는 핵심임을 설파하고
있다.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고조
선은 삼일(三一) 사상을 바탕으로 진한·번한·
마한이 셋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셋이였다. 각기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전 또한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은 위만의 손
체를 아우르는 정치적 중심체 역할은 진한 자인 우거왕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
이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한은 대단군이 켰으나, 해성 이북의 영토를 빼앗기고 탈환
통치하고, 번한과 마한에는 각기 부단군을 하였다는 기록과 위씨 정권의 공격에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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