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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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였다. 실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매헌 출생년에, 천도교 4대 교주에 오른 춘암 휘

                하의 천도교가 한민족의 자유 독립과 갱생을 위하여 농어촌교육과 다양한 저술 활동
                에 열성적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천도교 청년당은 1924년 10월, 농민계몽 및 농

                민운동단체인 <조선농민사>를 만들었고, 여기서 월간잡지였던 <조선농민>이 창간되
                었다. 이 잡지는 매헌에게 있어 농촌부흥 운동의 교과서였다. 온실재배로 고구마 싹을

                내어 심고, 도중도에 돼지 막사를 지어 축산업과 야학 등등 농촌부흥 운동을 하는, 실
                질적 무실역행(務實力行)의 동력이었다. 여기에다 장인의 포교에 의한 동학사상이 더해
                졌다.

                  그리하여 매헌에게 있어 놀랍고 특이한 점은 시천주(侍天主)다. ‘물’이 운명적으로 매
                헌 윤봉길이 태어난 산천을 변별하는 주요 잣대였다면, ‘시천주’는 운명적으로 매헌의

                운명적 영혼의 ‘핏줄기’를 변별하는 주요 잣대라 할 만하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농
                촌 청년에게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 생

                성됨을 믿게 한 것이다.
                  배성선은 천도교를 생활화하였다. 그는 매일 아침 동학 주문을 외우면서 동틀 무렵

                이면 청수를 떠 놓고 기도 올리곤 하였다. 매헌에게도 동학 주문을 암송하며 기도를
                올리면 신기한 능력을 덧입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실천적 포교(布敎)였다. 장인에
                의하여 은연 중 매헌 역시 하날님을 모시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여 평상시에 매헌이

                직·간접적으로 천도교를 글로 쓰거나 입 밖으로 동학을 말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헌이 동학도였음을 근접하는 어떤 객관적 사료나 자료도 없다.



                 3. 일본인 기록관의 증언

                  그렇다면 매헌의 동학 관련성은 사료나 자료가 없어 무용한 논지인가. 아니다. 가나

                자와 사형장에서 총살형 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32년 12월 19
                일 오전 7시경, 매헌은 가나자와시 외곽 사형장에서 총살형을 목전에 두었을 무렵이

                다. 이날 아침밥을 거부할 시부터 오늘 죽는다는 죽음을 직감하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들이었다. 상해 감옥 수감 당시나 오사카 감옥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하

                면서 매헌은 장인의 표정들과 포교를 회상하였다. 최수운이 체험한 기이한 체험의 중
                심 내용 축약인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 주문을 외우지 않
                을 수 없었다. 신통한 능력을 덧입는 주문을 외우면서 자아의 집착을 버리고 평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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