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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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지
군자금과 식량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 지원 활동을 하면서 남자현은 1920년
일제의 대토벌 작전에서 피해를 입은 독립군 간호에 힘써,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긴 독립군끼리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자유시 참변! 이에 남
자현은 7일간 곡기를 끊고 단식기도를 하며 다시금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단체 책임자들에게 보냈다. 다행히 만주 지역의 책임자들은 남자현의 붉은
충심을 받아들여 다툼을 멈추고 단결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에 남자현은 좀 더
치열한 투쟁을 준비하였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라!
1926년 4월 남자현은 박청산, 김문거, 이청수와 함께 조선 종독 사이토 마코
토를 처단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쉰이 넘은 그가 암살단에 들어가니 난색을
보였지만, 오히려 남자현 같은 여성이 유리하다고 역설하여 동참하게 되었다. 권
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들고 서울로 향했다. 송학선(宋學先, 1897~1926) 의사가
먼저 의거를 단행하였지만 실패했고, 끝내 붙잡혀 이듬해 처형을 당했다.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 작전에 거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몇 번이나 붙잡힐 위기를
겪은 뒤 겨우 서울을 떠날 수 있었다.
혈서와 왼손 무명지 두 마디
괴로운 시기인 이즈음 고성 이씨로 안동 명문가 출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병사하였다. 남자현으로서는 그 슬픔을 가눌 수 없었다. 일제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고, 무력 투쟁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적 방략을 시도하였다.
1932년 9월 중순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수립하자 이를 조사하
기 위해 국제연맹이 조사단을 파견하게 되어 일본의 강제 점령의 부당성과 우리
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왼손 약손가락 두 마디
를 잘라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과 함
께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강한 독립 의지를 전달하였다. 하지만 혈서 전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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