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P. 109
2024. 7·8
부터 난항을 겪었고, 결국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고 하면서도 만주에 대한 권리
를 인정한 리튼 보고서로 볼 때 남자현이 피로 전한 뜻은 전해지지 않았음이 분
명했다. 외교적 청원으로 독립은 요원한 일이었다.
마지막 임무
생애 마지막 거사를 계획하였다. 1933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 기념행사가 열
릴 때 주만 일본 대사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처단하기로
했다. 연락 및 무기 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거지 할멈’ 차림으로 변장한 채 하얼
빈 교외를 정탐하였다. 거사 전 홀로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자현
은 무토와 함께 죽기로 각오했으니 생애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붙잡힐 당시 남자현은 남편의
피 묻은 군복과 권총, 폭탄을 지니고 있었다. 남자현은 홀로 책임을 졌다. 60세
가 넘은 나이로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에 죽기를 각오하고 8월 6일
부터 보름에 걸친 단식투쟁을 하였다. 행여 남자현이 감옥 안에서 죽으면 자신들
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한 일본은 남자현을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풍진 세상 환갑을 넘겨 살았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고, 이제는 늙고 병들어 일
제와 싸울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한 남자현은 치료와 음식을 모두 거부한 채, 아
들과 손자 앞에서 유언을 남기고 잠을 자듯 숨을 거두었다.
남은 이야기
1933년 남자현이 세상을 떠난 12년 후 조
국은 광복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
령장이 추서되었다. 1962년 3월 1일에 정부
는 독립유공자 58명에게 건국 공로 훈장 복
장을 수여했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는 최
고의 등급이다.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 “조
선의 총구”, “변장술의 천재”, “세 손가락 여장
군” 그리고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호가 있
었다. 그의 앞에서는 여자라서, 나이가 많아서 남자현 임종 소식을 알리는 조선중앙일보 기사
1933.8.27.‘무토 모살범 남자현 수 별세’
©국사편찬위원회
107
월간대한사랑_8,9호_본문(인쇄).indd 107 2024-07-22 오후 1:5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