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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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사늑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당하고, 1907년 정미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었다. 이
에 사위와 제자 수십 명을 잃은 부친이 의병을 일으키자, 남자현은 77세의 부친
을 도와 의병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압도적 무력 앞에 의병투쟁은 힘을 잃었고, 친정은 일제의 탄압으
로 큰 고초를 겪었다.
1910년 결국 국권이 피탈되고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남자현은 양잠을 통해
번 돈으로 부녀자들 계몽과 아이들 교육 사업에 쓰면서 의병투쟁을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며 그들의 국내 공작을
은밀하게 도왔다.
독립운동 선두에 서다
몇 년 뒤 시어머니 상을 마치고 아들의 혼사까지 치른 후,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
어들었다. 이때 남자현의 나이 47세였다.
만주에는 안동 출신 친인척과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망명하여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껴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을 하였다. 타지에서 많은 대원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고
된 일이었다. 부녀자들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랑도 없이 묵묵하게 모든 힘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감동적 헌신이로되, 독립투쟁에서조차 남녀유별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현의 이후 행적은 이런 굳은 남자들의 인식을 깨부수었다.
첫 번째 단지(斷指)
1920년 8월 29일 경술년 국권피탈을 잊지 않으려 독립군 지도자들이 모여 대
회를 하던 날, 칼을 들어 왼손 엄지손가락을 베었다. 당시 1920년 6월 봉오동 전
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이후 대대적인 일제의 대토벌 작전에서
막중한 피해를 본 동포사회에는 의기소침한 기운이 감돌았기 때문에 남자현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흐르는 피로 혈서를 써서 큰 소리로 읽었다. “나라를 빼앗긴
수모를 잊지 말자!” 대회장에 모인 동포들 모두가 함께 울면서 외쳤고, 모든 이
가 다시 전의를 가다듬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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