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월간 대한사랑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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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거사는 꺼져 갈 듯한 임시정부에게 생명줄

               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이었다는 것이 밝
               혀지고 김구에게는 58억원의 현상금이 붙었다.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있

               는 임시정부를 급습한 일본은 안창호를 체포하고 김구를 찾는데 혈안이
               된다. 한편 김구는 미국인 선교사 죠지 애쉬모어 피치 부부의 기묘한 도움
               으로 자싱으로 탈출한다. 당시 죠지 애쉬모어 피치는 윤봉길 의거 후 자기

               집에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숨겨주었는데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자
               신의 차 뒷자리에 김구와 부인을 태우고 자기는 운전사로 가장해 김구를

               무사히 자싱으로 피난시킨다.
                임시정부는 항주로 피난을 갔고, 김구는 자싱에서 중국 여성 뱃사공 주

               애보와 가짜 부부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면서 임정을 이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돕게 되는

               데, 중일전쟁이 일어나 국민당 정부가 난징에서 충칭으로 가면서 대한민
               국 임시정부도 충칭으로 갈 수 있게 돕는다. 김구는 국민당 정부와 먼저
               충칭으로 가고 항주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충칭까지 육로 3

               천리, 수로 3천리의 머나먼 여정을 감행한다.
                임시정부는 남의 나라 중국 땅에서 상해, 자싱, 항주, 충칭을 거쳐 26년

               간 독립을 위해 싸우며 지켜내다가 충칭에서 해방을 맞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난했던 일제 강점기 끊임없이 일제를 상대로 싸
               우며 조국독립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혹자는 일본이 원폭을 당해 저절

               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우
               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독립투쟁을 이어온 것이 중요하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자긍심을 말할 것인가.
                 물론 연합군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고 일본이

               항복을 했지만, 우리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광복군을 창설하고 연합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존감이 우리나라를 오늘에 이르

               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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