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월간 대한사랑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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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에도 울려 퍼졌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삼일문을 세우고 시가행
               진을 하며 만세를 외쳤다.

                 한편 상해에 있는 신한청년당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신한청년당 대
               표자격으로 파리에 보내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주장하게 한다. 김규식

               은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1919년 2월 1일 파리로 출발해서 3월 13일
               에 파리에 도착했다. 김규식은 곧바로 파리에 한국공보국을 설치했다. 그

               러나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정부를 대표하는 자격이라야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규식은 서둘러 임시정부를 조직하라는 소식을 각지에 보낸다. 이 소

               식에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은 하루빨리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곳곳에서 무려 일곱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난다. 그러나 일곱 개 중 세

               개만 조직과 실체가 있고 네 개는 이름만 있는 상황이었다.
                 최초의 임시정부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조직되었다. 최재형을 비롯
               문창범, 유인석, 홍범도, 신채호 등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

               장하던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가장 먼저 의회정부를 세우고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칭한다. 임시정부 중에서 가장 빠른 1919년 3월 17일이

               었다. 대한국민의회의 전신은 ‘전로한족중앙총회’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에 살던 한인들 전체를 망라하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했고 그



























               최재형(崔在亨, 1858~1920)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의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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