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월간 대한사랑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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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동안 중국 땅에서 지켜낸 임시정부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위기를
겪었다. 우선 임시정부의 재원마련이 큰 난관이었다. 온 국민의 독립에 대
한 열망은 당시 멕시코에 팔려간 기민들도 동참케 했다. 가시가 너무 많아
마귀나무라고도 불리고, 어저귀라고도 불린 용설란을 잘라내는 멕시코 농
장에서 한인들은 자신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며 피눈물이 담긴 독립자금을
보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남의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을 하면서 독립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주린 배를 참아
내며 독립자금을 보냈다.
특히 국내로 잠입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자금을 모금해서 상해
까지 가져가는 일은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이었다. 파란 눈의 아일랜드인이
이륭양행 회사를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이 상해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
도록 도왔는데 그가 바로 죠지 쇼우이다. 아일랜드인 죠지 쇼우는 아일랜
드와 영국이 독립전쟁을 하는 시기였기에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는 한국인
들을 동병상련으로 도운 것이다.
그러나 독립자금은 늘 부족했고 임시정부는 늘 위태위태했다. 이즈음
임시정부 초기에 문지기라도 시켜 달라던 김구가 임시정부 수장을 맡게
된다. 김구는 임시정부에 획기적으로 변화와 활력을 얻기 위해 안중근 의
사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과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한인애국단 첫 번째
단원이 이봉창이었다.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동경
으로 가서 일왕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진다. 그러나 일왕은 다른
마차에 타고 있어서 일왕척살은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대한의 청년이 과
감하게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일은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나이 31세였다.
그 후 두 번째 한인애국단원이 김구를 찾아간다.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단행했다.
일제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홍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을 열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는 기념식 단상으로 폭탄
을 던졌다. 이날 기념식에 참석했던 일본의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인 가와바타가 사망했고 노무라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가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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