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월간 대한사랑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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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3
다. “반드시 열도 끝까지 쫒아가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영화 속 이순
신 장군의 대사가 사실 여부를 떠나 일본의 재침략을 우려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함대는 철수하려는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구
1)
조하러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 의 왜군 함대가 남해와 하동 사이의 폭이 매우 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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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으로 진입하자 일제히 공격하여 궤멸적 피해를 입힌다. 이것이 노량해전의 전체
전투 개요다.
왜군은 1597년 10월 직산전투(천안)와 명량해전의 패전으로 육로와 해로가 막혀
전쟁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여 본국으로 철군하려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
3)
군을 금지시켜 남해안 일대 왜성 에서 농성을 하며 지구전을 전개하는 상황이었다.
1)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ㅣ임진왜란의 선봉장(제1군대장)으로 침략의 상징적 인물. 아버지가 약재무역상으로 집안이
부유하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외교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함.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
임이 두터워 선봉장이 됨.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승리하면서 진격할 정도로 전략 전술도 뛰어남. 조선에서 마지막 전투였
던 노량에서 시마즈를 희생양 삼아 도주에 성공했으나 일본 내 패권전쟁(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멸문지화를 당했다.
2) 시마즈 요시히로ㅣ사쓰마 번의 17대 당주(번주, 다이묘)로서 임진왜란 때 1만 명과 정유재란 때 1만 명, 총 2만 병력을 이
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3) 남해안 왜성ㅣ왜군은 원활한 수송과 보급 그리고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쟁초기인 1592년과 1593년, 그리고 정유
재란 때 집중적으로 쌓아 30여개 성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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