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월간 대한사랑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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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피해서 전수된 『환단고기』

              또한 『환단고기』의 9천년 역사 복원의 땅이 바로 호남이다. 해학 이기가

            『환단고기』 80% 분량을 차지하는 『태백일사』를 전수받아 『환단고기』를 엮은
            운초 계연수에게 전해주었다. 해학 이기는 김제에서 태어났고 호남 3대 대문

            호로 불리던 분이다. 일본 왕을 저격하기 위해서 결사대를 조직했다가 실패하
            고 나라가 망하기 전후에 절식을 해서 돌아가신 분이다.
              그의 애제자 운초 계연수는 만주 관전현에서 역사 운동을 하다가 조선인

            민족 반역자 감영극의 고발로 일본에 끌려가서 죽검으로 맞아서 눈알이 튀어
            나오고 뼈가 다 부러졌다. 그래도 굴복을 안 하니까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

            고 그 시신을 압록강에다 집어 던졌다. 거기서 스승의 뼈마디를 수습하던 14
            세 소년 이유립과 그의 아버지 이관집 부자가 비장한 맹세를 천지에 올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환단고기』 원본 한 권을 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 해학 이기

               1848년 김제에서 태어난 해학 선생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인 1894년(36
             세) 전봉준 장군에게 “군중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국왕 주변의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왕을 받들어 국헌을 새롭게 하자”고 제의를 하는 등 일
             찍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이듬해 1895년 농민생활 등의 안정

             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최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중앙에 진
             출하여 전제(田制)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등 현실을 직시한 정책을 내었다.
               러일전쟁 종결 전에는 우리의 옛 영토인 서북 간도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

             였고, 러일전쟁 후에는 미국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모종의
                                                          결정이 내려질 것을 확신

                                                          하고,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외부대신에

                                                          게 건의했다. 이처럼 해학
                                                          선생은 누구보다 앞서 국

                                                          제정세를 헤아릴 줄 아는
                                                          시대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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