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월간 대한사랑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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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선언과 보천교

              “남한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

            자”는 선언은 정읍에서 발표되었
            다. 보천교의 중심이던 정읍에서 임

            시정부로 많은 독립자금이 지원되
            었고, 한미동맹의 발상이 보천교에
            서 시작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동방의 청룡(靑龍) 기운이 동하
            면 백호는 물러가느니라.”, “쌀은 미국이고 솥은 조선이니 밥을 하려면 쌀이 솥으로 올

            것 아니냐. 장차 일본이 나가고 서양이 들어온 연후에 지천태(地天泰) 운이 열리느니라.”
            라는 내용을 보천교 신도들은 알고 있었고,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던 보천교 신
            도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광복 후에 백범 김구 선생도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라고 했다.(탄허 스님의 세속의 사
            위인 서우담씨 증언) 탄허스님의 부친 김홍규는 보천교의 4대 방주이자 재무담당이었다.
            김홍규는 보천교를 하기 전에 상해임시정부에 자신을 국내 독립자금 모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할 정도로 애국심을 가진 지사였다. 대전현충원 독립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보천교의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

              보천교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하는 극동민족회의(원동약소민족회의, 제1차 극동피압박인민대회, 근로자 대회, 제1회 극동공산주
            의 단체 및 혁명단체대회로도 불렸다)에 참가하려던 김규식 등에게 참가 여비로 1만원을 지원
            하였다.(1910년 기준 1만원은 순금 2푼 가치였다. 지금으로는 약 6억 5천만원에 해당한다) 또한 같은 해

            독립운동가 임규를 통해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으로 5만원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1923년에는 김좌진 장군에게 5만원의 군자금을 지원하여 무장대의 편성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독립운동 활동은 크게 2가지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는데, 하나는 조직을 통한 투쟁
            활동과 군자금 마련이었다. 국외에서 임시정부 등 조직을 갖춘 독립운동단체들은 주로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받아 활동을 했는데, 당시 국내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보천교 신
            도들이 낸 성금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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