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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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따라 6세기 중반 요서 지역에는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화강 유역의 물길 일파가 이주해 요서
말갈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공백이 이주의 배경으로 주목된다. 즉 돌궐의 흥기와 거란
의 쇠퇴를 배경으로 물길의 일부가 요서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요서말갈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요서말갈의 이주는 돌궐과 무관할 수가 없다. 29) 이와 관련하여 563년 『북제서』 「무성제기」에 처
음 등장하는 말갈의 조공 기록, 이것은 돌궐의 비호 하에 가능하였다는 견해 30) 가 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유민과 말갈집단이 돌궐에 많이 의지하기도 하였고, 발해 건국 후에
는 고구려에 이어 발해는 [그림 1]과 같이 돌궐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나라를 견제하였다.
이때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발해말갈과도 동일한 관계가 유지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관계도 돌궐
이 당나라에 멸망하면서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림 1 : 6세기~8세기 동북아시아 3국 관계]
5. 말갈과 거란의 관계
거란의 말갈인식부터 살펴 보면, 거란은 말갈을 고구려와 발해의 구성 종족으로 인식했고, 후대
로 갈수록 혈통과 문화적으로 공유되어져 친연성을 갖고 있으며, 발해 때는 발해의 건국주체이자
주요 구성 종족으로 인식을 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는 포용정책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란의 포용정책을 수용한 종족을 숙여진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종족을 생여진이라고 한다. 훗
날 생여진이 세력이 강성해져 거란의‘요’를 무너뜨리고‘금’을 세우게 된다. 같은 북방유목민족이
지만 거란은 동호-선비계이고 말갈은 숙신-읍루계로 인식되어졌다.
29) 이정빈, 「6세기 중ㆍ후반 요서말갈과 돌궐ㆍ고구려」, 『동북아역사논총』제61호, 2018.08.
30)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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