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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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과 여러 북방민족들 간의 관계 정립이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 인식 체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민성욱
㈏-1와 ㈏-2의 기사에는 읍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이 기록들만 본다면 읍루는 숙신-물
길-말갈로 이어지는 종족 계통과는 다른 종족 계통으로 볼 수도 있다. ㈎-2는 여러 말갈 가운데
흑수말갈은 읍루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숙신 가운데 일부가 읍루가 되었으며 이들을 흑수
말갈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숙신 가운데 일부는 물길이 되었다가 말갈로 변하였으
나 다른 일부는 읍루가 되었다가 물길을 거쳐 흑수말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갈과 물길의 관계에서 물길은 말갈의 선행 종족이었으나 숙신-읍루계의 전체가
모두 물길로 대체되지는 않았으며, 물길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많은 지역에 숙신-읍루 종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 이후에 말갈로 족명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4. 말갈과 돌궐의 관계
6~7세기 말갈은 만주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 전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길에서 갈라져 나온
일부 말갈 집단이 요서지역에도 거주하였다. 이를 요서말갈이라고 한다. 28) 요서말갈은 말갈 7부
중에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말갈의 일부 집단
은 고구려에 복속되기도 하고, 돌궐에도 복속되기도 하여 시기와 위치에 따라 고구려와 돌궐의 세
력권 하에 있었다.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는 당나라가 그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로 돌궐은 고구려에 이웃하
고 있었다. 또한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서로 동맹을 맺고 도왔다. 즉 전략적 제휴 관계에 있었
다. 그 이전에는 단군조선의 세력 범위 내에서 공존하였고 동일한 문화와 가치관을 공유하였다.
그 뒤 수ㆍ당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돌궐은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지금의 터키지역에 자리 잡
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인 터키가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네
번째 많은 병력을 파병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며 동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 돌궐(투르크)이 당시 당나라의 세력 팽창에 밀려 패권을 빼앗기고 서진할 때 흉노(훈족), 유연
(아바르족), 거란(키타이), 말갈(마자르족) 등도 함께 서진하였다. 훈족과 말갈(마자르족)이 세운
나라는 헝가리가 되었다. 그 후 중세시대에는 몽골의 팽창으로 인해 또 서쪽으로 밀려나는 등 오랜
기간을 거쳐 현재의 터키지역으로 이동하다가 세력을 키워 1453년 이스탄불의 전신인 콘스탄티
노플을 점령하면서 현재의 터키지역에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흉노의 뒤를 이었던 선비 제국과 선비의 후예가 세운 유연(330~555년)이 멸망하자 돌궐이 몽
골 고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552년 영걸, 부민 카간이 나타나 유라시아 대초원 동서와 남북 일대를
차지한 돌궐 제국을 세웠다. 6세기 중반 요서지역을 대표하던 거란 제부는 북제ㆍ돌궐의 공격과
압박으로 연이어 동요했다. 적어도 10만 이상의 거란인이 요서 지역 밖으로 이산(離散)했다. 이에
28) 이정빈, 「6세기 중ㆍ후반 요서말갈과 돌궐ㆍ고구려」, 『동북아역사논총』제61호,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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