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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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말갈은 그 음이 서로 근접한다.”라는 기록, 수ㆍ당 대의 독음을 연구하여 당대에는 비슷한 음이었
음을 밝히고 있다. 24)
숙신-읍루족의 거주지역에서 5세기경 물길이라는 명칭을 가진 읍루의 후신 종족이 나타났다.
읍루와 물길은 서로 이름은 다르지만 그들은 같은 종족 계통이었다. 물길이 역사 무대에 처음 등장
한 시기를 단정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은 없으나 연흥 5년(475년)에 물길의 을력지(乙力支)가 북위에
사신으로 간 시기보다는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길의 존속기간은 첫 조공기사가 보이는 475년부터 마지막 조공 기사가 보이는 572년 사이는
97년에 불과하지만 앞 뒤로 수십 년 더 존속했을 것으로 보고 대체로 5세기 중ㆍ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물길이 존속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물길이 숙신-읍루계와 동일한 종족 계통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모든 지역
에서 숙신-읍루계가 일제히 물길로 이름을 고쳐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뒷날 발해시기에 막힐부
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살고 있던 읍루의 한 집단이 먼저 물길이라고 칭하고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숙신-읍루계는 한참 후에나 이름을 물길로 고쳐 불렀거나 아니면 끝까지 명칭을 고수한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물길은 숙신-읍루계가 분포했던 지역에서 그 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송화강 유역의 부여 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옥저 지역까지 확대 내지는 이주를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사 기록상 숙신-읍루계가 곧 말갈이라고 한 것은 물길의 종족 연원
을 밝히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흑수말갈이 물길로 불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흑수말갈뿐만 아니라
일부 말갈 집단은 숙신-읍루에서 물길을 거치지 않고 말갈로 바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숙신-읍루계의 공통점으로 물길 또한 중앙집권 형태의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았고 부
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물길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집단 내에서 군사를 동원해서 참
전시켰다가 전쟁이 끝나면 각자 부락으로 돌아가 이전과 다름없이 수렵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물
길은 강한 군사들을 많이 징집, 동원하여 동부여국을 공격하여 멸망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25)
물길과 말갈 관계 관련 기록은 중국정사에는 『위서』와 『북사』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1.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 숙신국이다.” 26)
㈏-2.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27)
재평가되었다. 전체 200권이고, 고증 3권이 붙어있으며, 기전체로서 본기, 연보, 세가, 열전, 재기와 이십략(二十略)
등이 포함되어 있다.
24) 권은주, 「말갈 연구와 유적 현황」, 『중국학계의 북방민족ㆍ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05.
25) 장국종, 『발해국과 말갈족』, 중심, 2001.09.
26)『魏書』卷100「列傳」第88 勿吉,
“勿吉國, 在高句麗北, 舊肅愼國地.”
27)『北史』卷94「列傳」第82 勿吉,
“勿吉國在高句麗北, 一曰靺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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