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6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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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4. 중국의 ‘고사부정론’에 영향을 받은 저서의 번역과 청동기 관련 논문의
문제점
현 중국학계는 100년 전 고힐강에 의해 제기된 ‘고사부정론’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사
실이다. 지금까지 이들은 殷商시기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였는데 계속 발굴되는 지하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殷商시기 이전의 유물들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동안 중국학계는 발굴되는
殷商 이전의 모든 유물에 대해서는 商 전기 이후로 비정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대의
夏시기 이전의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비정시기가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함으로써 학술적 혼란이
가중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중국이 ‘하상주 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추진하여 중국의 역사 기원을 1만년
가깝게 설정하고 보니, 종전의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비정 원칙과 현재의 발굴되는 고고학적 비정
의 원칙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미 문제되었던 1973년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에서 발굴된 청동기
禮器들은 소수가 商시기로, 대부분 서주시기로 비정하였다. 중국학계는 ’기자동래설‘의 근거로 삼
고 있는 ’기후방정(㠱候方鼎)’과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의 비정시기를 西周시기로 잡았다. 또한
稱父辛 鼎과 魚尊 까지도 西周시기로 비정하였다.
이들 청동예기들은 늦어도 서기전 24세기 이전의 인물들과 깊이 관련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는 천년이나 뒤로 비정하였다. 즉 기후방정(㠱候方鼎) 명문(銘文)에는 요, 순, 중료, 오회
간에 관련된 기사가 있으며,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의 銘文 내용은 마지막 왕인 伯益이 태자시절
받았던 임명장이었다. 그런데도 중국 학계와 일부 한국 학자들도 기후(㠱候)를 기자로, 고죽국(孤
竹國)으로 간주해던 것이다. 이들은 청동기 명문의 정확한 내용조차도 모른 채‘기자조선 동래설’
을 주장하였다. 稱父辛鼎의 辛은 제곡 高辛 의 족휘다. 따라서 稱은 高辛의 고모이다. ‘魚尊’은 고양
의 아들 곤(鯀)과 깊은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西周로 비정했던 이들의 잘못이 크다 할 것이다.
Ⅴ. 중국의 우리 역사·문명 침탈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전략
1. 우리정부의 대외 외교전략 행태 회고
중국이 동북공정을 도발한 지 20년이 지났다.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를 훔치려는 이들을 막기
위한 정부의 대응책은 너무 허약하였다. 광복이후 이승만 정부를 제외하고는 우리 정부가 펼친 모
든 외교전략 중 국가적 핵심이익과 관련된 외교는 십중팔구 실패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시기는 말할 필요가 없다, 국제법상 불법적인 을사늑약이나 한일병탄조약 조차
목숨을 내걸고 반대하는 신하조차 없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견디어 낸 것도 다행이었다. 1909
년의 일·청간도 협약은 당시 이등박문 통감에 빌붙은 박제순 때문에 대한제국의 간도 외교권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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