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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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 문명 역사공정에 대한 대응전략  이일걸



                 제에 넘어갔듯이, 중국의 동북공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침탈당한 것은 오직 친중파 기회주의 정치

                 인과 관료들 때문이다.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시킨‘신한일 어업협정’, 1년 뒤 소련의 해체도 예상 못하고 30억 달

                 러를 주면서도,1937년도 연해주 한인들의 강제이주에 대한 보상조차 요구하지 못하고 체결한
                 ‘한·소수교조약’, 북방정책의 완성이라고 떠들면서‘하나의 중국론’에 두 손 들고 대만에는 예정 없

                 는 단교조치 후 체결한 ‘한·중수교조약’, 왜 당시 우리 위정자와 외교관들은 ‘하나의 한국론’을 주
                 장하고 중국에 ‘북한과 단교하라’는 마지막 카드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핵심이익보다 위

                 정자의 임기 내 업적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국민은 없었다. 갑작스런 단교로 수출 길이 막힌 시골의
                 사과와 감이 주렁주렁 달린 풍경이 을신년스러웠다.

                   2004년 8월 중국의 역사 침탈로 광화문이 시끌벅절 했을 때, 우다웨이(武大偉)가 방한하여 채결
                 한 것이 양국 간에 ‘5개항의 구두양해’라는 외교관례도 없는 희한한 합의를 하고 말았다. 이 5개항

                 은 구체적인 사항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조항으로서 이를 중국이 위반하여도 제재할 수 없는 내
                 용이다. 이미 지난 2월 14일 방한했던 왕의(王毅) 중국외교부 부부장과 양국 간에 학술적 해결에

                 합의한 바가 있는데 그 내용도 “고구려사 문제는 정치화하지 않으며, 학술단체의 연구를 통해 문제
                 를 풀기로 하여,‘한중고구려사 학술회의 개최’합의하였지만, 중국은 한 달도 안 되어 본격적으로

                 고구려사 역사 등을 다시 왜곡시켰다.             97)  이 5개항은 우다웨이의 ‘학술적 해결’에 속아버린 위정자
                 들과 관료들이 오늘의 역사침탈의 책임을 질 수 있은 자가 있겠는가. 역사를 빼앗긴 민족은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린 민족이 되길 마련이다. 당시 이들의 이름을 작은 팜프렛에 ‘동북공정 칠적’이라
                 지칭하고, 역사에 길이 남기기 위해 서울 광장에 뿌리고 말았다. 당시 우다웨이는 우리 정부 관료

                 들과 만나면서 내뱉은 말이 10년 뒤에 알려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
                 지 않는다면 우리도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였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서도 ‘5개항의 구두양해’에 합의한 이들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자랑스러운 별나라에서 왔다던,
                 노무현, 김원기, 이해찬, 천정배, 임채정, 반기문, 이종석이 이들이다.



                     2. 우리 정부 공무원들의 애국심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을 만들자.




                   2003년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관련 학술단체들도 30여 개 단체들과 함께 범국민 연대를
                 결성하여 동북공정 저지를 위해 공동 대응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역사에 무지하고 무개념으로 일

                 관해온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침탈 행위를 묵인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사태를 불렀다고 성토하였다. 2004년 8월 고구려사 왜곡문제가 일어나자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이 내한하여, 반기문 장관, 이종석 안보회의 차관, 최영진 차관 등과 면담 및 협상
                 결과 “5개항의 한ㆍ중 구두 양해”에 합의하는 바람에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단지 중

                 97)이일걸,「間島協約 締結 100년의 回顧와 展望」,『白山學報』제85호, (백산학회, 2009),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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